아는 맛

2023년 12월 25일

by 김보


열일곱번째 해외여행을 떠나며,

점점 나의 여행이 간소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나이가 들수록 MBTI J와 P가 타협하는 경우가 대반사라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P 쪽으로만 한없이 수렴하는 것 같다.

굳이 계획하지 않는 쪽으로 말이다.


이번 비행기 표는 출발 단 이틀 전에 결제되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행을 결심한지 만 사흘이 안 됐다.

참 대책없는 사람이라 할 지 모르지만,

글쎄 어느 치열한 준비광 J도 같은 여행이 반복됨에 따라서 무언가는 간소화 되고 있지 않겠는가?

공항에서 시내 가는 법이라든지, 필수회화를 몇 개 익히는 것이라든지,

혹은 새로운 풍경에 대한 기대나 설렘 같은 감정들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아는 것들은 쉽게 간소화되고 빠르게 무뎌진다.

애초에 여행을 설레하는 이유는 희소함 때문이 아니던가.

생각해보면 지금 지겨운 모든 것들도 희소했던 시절엔 설렘이었다.

첫 출근이 설렜던 기억, 처음 먹은 마라탕에 흥분했던 기억, 그 애를 처음 봤을 때 느낀 두근거림.

일상이 되면서 지겨워진 것 뿐이다.

디테일한 감정들이 간소화 됐을 뿐이다.

권태는 가려움 같은 감정이라, 굳이 여행 같은 걸로 긁어부스럼하는 것이다.


조금 삐딱하게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구름 위에 뜨는 일도, 낯선 나라 공항의 첫 숨을 들어마시는 일도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때운다거나

숙소에서 하루종일 창밖으로 바라보는 이국의 풍경 정도로도 충분하다.

담담한, 어쩌면 염세적인 기분으로 거리를 걷다보면

내 발자국 소리도 텁, 텁 하는 소리로 느껴진다.

그저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더 지겨운 곳에서 덜 지겨운 곳으로 옮겨오고 싶었을 뿐이었다는 생각과 함께.


우울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어떤 때에는 기대를 한다는 게,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게 더 우울할 때도 있다.

그저 가만히 내 속에 어떤 할 말이 있었는지 살펴볼 시간이 필요했다.

과장할 것도, 기대에 크게 휩쓸릴 것도 없는 상태가 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이번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꼭 혼자가 되어보고 싶었다.

아주 이방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이곳에 왔다.

이미 아는 맛이라 아무 기대도 없는 오사카 정도로.

내게 주는 선물이나 특별한 한 해 마무리 같은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쌓인 권태 같은 걸 긁적이고 싶어서, 뭔가를 끄적이고 싶어서.


이제부터 올해 가려운 것들이 뭐였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려고 한다.

한 일주일 걷다보면 내 안의 무언가 해소될 수도 있겠지.

그럼 조금은 후련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을 구구절절 꺼내며 어묵을 씹었다.

입김인지 국물의 김인지 하염없이 피어오른다.

일본 아재들의 담배 냄새가 꼬숩다.

일본어 캐롤은 한 마디도 몰라서 뉘앙스만 뜨문뜨문 전달될 뿐이다.

지금 적당히 취하는 것 같다.


서른두살의 크리스마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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