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2023년 12월 28일

by 김보


어제는 오사카에서 자취하는 J의 집에서 잤다.

J는 9년 전 한 대외활동에서 만난 세 살 위 형인데,

며칠이든 재워줄테니 오사카로 오라고 제안했었다.

그의 이런 제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5년 전에는 영국에서 한 일주일인가 비슷한 식으로 신세를 졌었다.

나는 숙박비를 아끼는 이점도 있었지만, 세계를 돌며 여행이 아닌 ‘생활’을 하는 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타고난 애주가였기에 (인스타 아이디가 Drinking Nomad다…)

그와 함께 지내면 그 지역의 가장 맛잇는 술과 안주를 먹을 수 있었다.

물론 어제도 어김없이 한참을 만취한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그는 아마 뭔가 미납된 거 같다며, 상남자식 찬물 샤워를 조지고 출근했다.

하남자는 얼음물을 뒤집어 쓸 생각을 하니 순간 머리가 지끈거린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그대로 한 숨 더 잤다.

느즈막이 일어나 이불을 개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

열 한 시에 목욕탕을 오는 젊은이는 드물다.

동네 노인네들과 함께 탄성인지 탄식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지르며 노천 탕 목욕을 조졌다.

요 앞 동네 라멘집에 가서 해장도 한다.


이 모든 건 아주 태연하고 편하게 이루어졌다. 꼭 제 살던 동네처럼 말이다.

그 짧은 시간에 J의 생활들이 조금 옮았다.

익숙해졌단 뜻이다.

사실 해외여행이란 거, 요즘엔 그닥 어려울 것도 없다.

현지인과 소통할 일도 없고, 식당에서도 손가락과 ‘구다사이’만 있으면 주문이 가능하다.

그것마저 요샌 키오스크가 다 한다. 한국어도 나온다.

그러니까, 일본어를 익히지 않아도 지내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는 거다.

거리로 나가 서울의 우리 동네를 겹쳐본다.

‘그래,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뭐.’

여행이 생활처럼 느껴지는, 별수롭지 않아지는 지점이 있다.

낯가림이 사라진 것이다.


이 동네에 조금 낯선 점은, 자전거가 정말 정말 많다는 거다.

그러니까, 인도보다 차도가 더 한산할 정도다.

어른아이 가릴 것 없이 열심히 바퀴를 굴리고 있다.

아니 무슨 정책 같은 걸 폈나? 자전거 주차장도 거리마다 있다.

아이들 한 무리가 전부 자전거를 타고 줄줄이 하교를 한다.

‘그럼 자전거를 못 타는 애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 동네는 자전거 타는 법도 학교에서 가르쳐 주나?


고백하자면,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라고 말하면 다들 놀란다. 자전거가 아니라 인력거도 몰 거 같이 생긴 외모 때문이다.

어렸을 때 무슨 무슨 트라우마 이런 식으로 포장하지만,

솔직히 나는 자전거 타는 방법 같은 건 몰라도 사는 데 지장 없다고 생각했다.

삶의 효율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몰라도 지장 없던 것들.

2차 함수를 이해하는 일이나, 별자리를 외우는 일.

키오스크를 두드리는 대신 그 나라 언어로 디테일한 주문을 하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따금씩 자전거를 몰고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그 속도의 효율보다도 그들이 보고 있을 자전거 탄 풍경이 부러웠다.

자전거를 타지 않으면 영영 모를, 얼굴에 스치는 바람이나 휙휙 지나가는 배경 같은 것.

그러니까 쓰잘 데 없는 ‘낭만’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정작 사는데 지장을 주는 것들은 몇 가지 없다.

질긴 생은 아무리 죽을 것 같은 불리한 상황에 놓여도 어떻게든 살아지니까.

자전거 대신 대중교통을 타거나 차를 몰면 된다.

그러나 낭만은 양념 같은 거다.

삶이라는 게 고기를 먹을 때처럼,

양념 없이는 먹고 싶다는 기대감이나 특별함을 느낄 수 없으니까.

퍽퍽한 생활 같은 게 꽤나 즐겁게 유지될 수 있는 건,

그런 불필요한 낭만 같은 것들이 삶 군데군데 맛있게 양념을 쳤기 때문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격언의 요즘 버전이 꼭 마음에 든다.

‘언어와 문화를 배우는 것은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라는 말.

어림짐작 같은 삶에서는 느끼는 것도 흐릿할 따름이다.

고기 맛을 또렷하게 느끼려면 어울리는 양념과 페어링할 술과 나라별 요리법을 알아야 하듯이.

아는 것을 애써 낯설게 하고,

다시 그것이 생활이 되고,

거기서 새로운 낭만을 발견하는 것.

그러면 퍽퍽한 생활 속에서도 고기의 새로운 요리법을 발견하고, 종업원의 인간미를 보고, 자전거 탄 풍경을 느끼고, 살아가는 재미 같은 걸 계속해서 찾아낼 수 있다.


낭만은 짧고 생활은 길~단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가뜩이나 짧은 낭만을 돌보는 일이다.

더 또렷하게 바라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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