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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주 비올라 Feb 10. 2023

구내염

자신을 스스로 공격하는 면역체계 장애

3년 전, 새벽. 악몽으로 깨어나, 잠결에 이웃 블로그를 보다가

급하게 길냥이 임보처를 구한다는 글에

그렇게 갑자기 오게 된 코숏 우리 집 첫째 냥이 해피



보통 임보시에는 아픈 아이를 보내지 않는다.

꼭 보내야 한다면 아픈 상태라고

병원에 진료 이동이 가능한 임보처를 구한다고

미리 공지되어 있는데 그 아이는 너무 급했는지, 

아무 사전 공유 없이, 약봉지와 함께 왔다.



두 달이 지나고 약을 다 먹어 병원에 가니  

구내염이라고 고양이 이빨을 모두 뽑아야 한단다.

고양이 입속 면역체계에 이상이 생겨서

이빨을 적으로 간주하고 계속 염증이 생기는 거란다.



어떻게 자신의 입속 이빨을 적으로 여기다니

하긴 우리 몸속의 암도 그런 면역체계 장애이지.




엄마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 해놓았던

30대 시절의 나, 그 당시 엄마는 나에게 <적>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직장도 없이,

정말 무일푼으로, 아무런 대책 없이 서울로 온 것도

엄마를 피하고 싶어서였다.


가난에 찌들어 장학금에 목숨 걸고 

매일 반복되는 아르바이트로 겨우 대학을 졸업하고

기숙사가 제공되는 호텔에 취직한 나, 20대의 나,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월급 통장 속의 돈은 내가 확인하기 전에 모두 사라졌다.



나의 엄마는 내 카드와 통장을 몰래 가져가

써 버리는 것도 부족해 현금서비스와 카드대출로

딸자식을 당시 월급으로는 몇 년을 일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더미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4년, 나는 월급통장의 돈을 10원도 써보지 

못한 채 신용불량 직전의 부채 속에서 허덕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불쌍히 보신건지

좋게 보신건지, 대기업 교육담당자 한분이

호텔보다 기업교육 쪽이 더 잘 어울린다면서

대학원을 소개해 주셨고,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새로운 장소로 떠났다.

어디를 가도 지금보다 더한 지옥은 없었으므로


(지금도 연락하는 인연, 그러고 보면 부모의 연이 부족한 만큼

 그렇게 또 친구들과 직장에서의 연이 나를 이끌어주고 보살펴 준 듯)



엄마에게 마지막 전화를 했다.

나는 더 이상 돈을 벌지 않을 거라고

그동안 나는 내 평생 받은 모든 걸 다 갚았다고

이제 자식으로 당신에게 빚진 게 없다고

다시는 나를 찾지 말라고

마지막 말을 하고 수신차단 번호에 엄마 번호를 등록했다.



그렇게 내 나이 28살 되던 해에

엄마와의 인연을 끊었다.



이빨을 뽑아내야만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내가 나를 공격하지 않으려면

뽑아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연락을 끊고 산지 10년.



아마도 나의 아들이

어린이집에 적응만 해주었어도

결코 엄마와 다시 얼굴 마주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나의 아들은, 낯가림이 너무 심한 아들은

모든 사람을 거부하고 오직 엄마인 나만을 찾고, 

아무리 적응기를 견뎌보아도

결국 어떤 기관에도 어떤 돌봄 선생님에게도

적응하지 못하였다.



친정엄마 만은 싫다고 절대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나의 어린 시절을 모르는 아들의 아빠는

아들의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하고

아들이, 그 낯가림 심하던 아들이

친정엄마인 아들의 할머니 옆에는 잘 붙어 있는, 

내 평생 최대 난국의

불편함이 시작되고 말았다.



한동안 이때

직장을 포기하고 그냥 육아에만 집중했다면 어땠을까?

그럼 엄마를 다시 볼 일도 없고

엄마의 병원비를 내가 낼 일도 없고

아니 처음부터 엄마가 병원에 있을 일도 없을 텐데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을 수 없이 되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육아가, 하루 24시간

등에 붙어 있는 아이와 그렇게

365일을 둘이서 보내야 한다는 게


육아휴직 1년 만에

그토록 간절히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들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나의 엄마는 늘 나에게 적이었다.

나는 엄마 속에 있었지만 나는 엄마를 거부했다.


그 마음, 그 눈빛, 나의 그런 감정 어린 표정들이

엄마에게 전해지고

그렇게 엄마에게도 딸이 불편한 존재가 되어 갔겠지.


엄마는 그저 삶을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고

하고 싶은 게 많았고, 

새로운 것을 바로 하지 못하면 병일 날 것 같은 그런 성격이었을 뿐이었다.


남편의 교통사고로 몇 년의 병시중과

사업 부도의 빚잔치에서  겨우 벗어나자 


이제 뭔가 할 수 있게 되자,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지고

에너지도 넘치는데, 


그러나 위험한 것은 절대 싫은 딸이었던 나는 

날카로운 날을 세우고

집안에 있으라고 사고 치지 말라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잔소리만 퍼부어댔으니



그런 딸자식이

'적' 같이 느껴졌으리라.



분명 작년에 수익이 많이 났으니

올해 딸의 돈을 빌려서

수익만 많이 내면 딸도 용서해 주리라


그렇게 몰래 투자했지

설마 그렇게까지 장마와 태풍이 몰려와서

버섯농사가 망하리라곤 전혀 예상치 못한 거지


모든 게 "신" 탓이지.

어떻게 그해 하필 그렇게 비를 많이 뿌리셔서

딸을 빚더미에 앉게 하고


"그래, 그랬구나. 엄마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갑자기 기후가 예상치 못하게 태풍이 심해서

엄마도 놀랬겠다"


라고 해줄 수도 있거늘


'그렇게 꼭 두 눈을 시퍼렇게 치켜올리고

범죄라고, 자식 통장과 카드 훔쳐간 도둑이라고

몰아세우다니, 나쁜 년, 

딸자식 필요 없다. 역시 아들이 최고다.'


울며 소리 지르는 딸이었던 내 앞에서

죄인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던 나의 엄마는

아마 속으로 억울하고

늘 엄마 편이 되어주던 나의 남동생인 

엄마의 아들이 그리웠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경험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나의 엄마도 자신의 딸을 

<적>으로 착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세월호를 함께 탄 우리는, 

엄마와 나는 그렇게 서로를 공격하고 적이 되어가는

"면역체계 장애"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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