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주 비올라 Apr 04. 2023

그루밍 1

호감이라는 착각

  1997년 대한민국은 IMF 시대였다. 그때 대학을 졸업한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기숙사가 제공되는 시골의 호텔에 취직을 했다.  한 달이 지나고 어떻게 알았는지, 월급날 딱 맞춰 호텔로 찾아온 엄마는 내 통장과 카드와 도장을 가져갔다. 

  그 호텔은 여름이 성수기였다. 

IMF 라는데, 대한민국이 힘들다는데, 많은 여행객들이 여름을 즐기기 위해 휴가를 오는 곳이었다. 휴가를 오는 게스트들은 늘 팁이 후하다.  나는 돈 앞에서 충분히 비굴해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팁을 받기에 충분한, 가식 가득한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로 여름 동안 받은 팁들을 모아 나머지 계절을 버텨야 했다. 숙식이 제공되는 기숙사 직장이었지만, 매달 생리대도 사야 했고 담배도 사야 했다. 게다가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서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는 동생들에게는 휴무날 집에 간다고 하면 차비를 손에 쥐어주곤 했었다. 굳이 왜 그래을까?

  나의 월급통장은 엄마에게 있었고, 당시 아빠의 병원비가 계속 나가야 했고, 부도로 생긴 빚도 갚아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때 정말 엄마가 병원비와 빚을 갚는데 그 돈을 쓸 것이라고 혼자 착각했다. 그렇게 4년 후, 나는 다시는 돈에 관해서는 세상 누구도 믿지 않는다.

  여름이 지나면 호텔은 텅 빈다. 그래서 대부분의 기간은 기업체 교육으로 대신하였다. 대기업들은 기업교육을 대부분 그룹 연수원에서 한다. 그러나 직무교육이 아닌 리더십이나 대인관계 같은 교육은 조금 감성적인 부분이라, 그리고 교육대상이 조직의 임원이나 팀장들이라 교육장소가 호텔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게 그곳에도 여름이 끝나면 대기업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한번 교육이 시작하면 교육생들은 일주일 간격으로 계속 바뀌지만, 교육담당자는 3개월 동안 동일하게 계속 만나게 된다.

  그 당시 교육담장자는 2명이었다. 한 명은 박 과장.

키가 180 정도 크고 호리 하고, 서늘하다 못해 능글맞은 표정을 자주 지었다.

전체적으로 피부톤이 어두웠다. 늘 나에게 와서 어깨에 팔을 두르거나 슬쩍 손을 스치거나 그런 짖꿎은 장난을 쳤다. 나는 팁을 주는 사람 앞에서는 비굴할 수 있었지만, 돈이 나오지 않는 사람 앞에서는 지극히 냉정하고 차가웠다. 나는 얼음심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싸늘한 표정에 박 과장은 "에이 김주임(나는 당시 김주임으로 불리었다), 여기 이 호텔 말이야. 봐봐. 손님이 우리뿐이야. 우리가 김주임 월급 주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우리 없으면 김주임 직장 없어지는 거 아니야? 좀 친절하게 굴어봐~ 엉?"

능글능글 웃어가며 농담처럼 나의 눈치를 본다.

그런 흐물흐물, 능글능글한 미꾸라지 같은 김 과장에게 나는 늘 침착했다.

"저는 이 호텔이 망하면, 다른 호텔로 가면 됩니다. 김! 과장!... 님, 그리고 저에게 반말을 하시면 불쾌하오니 조심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정색하며 대꾸했다. 

  식사가 조금 늦거나 교육장 세팅이 안되거나 하는 실수마다 버럭 소리 지르고 다른 호텔로 옮기겠다고 협박을 하는 그 교육담장자에게 다른 직원들은 모두 비위 맞춰가며 손을 비벼대는데, 

그와 달리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드는 나를 늘 무언가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던 '최대리'.  그는 김 과장과 함께 오는 교육담당자였다. 

  '최대리' 그는 안경으로 커다란 눈을 가리고, 앞머리가 눈썹까지 내려오는데, 동그란 얼굴형을 가진, 전체적으로 '순하게 생겼다'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다.

키는 173 정도, 전체적으로 동글동글 귀여운 느낌. 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최대리'는 말이 별로 없었다. 나와 얘기할 때 내 눈을 쳐다보지를 않았다. 처음에는 '사시' 인가 오해할 정도로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당시 프런트 데스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아침 9시 출근하면 다음날 아침 9시에 퇴근이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고 교대하는 시스템.

여름에는 야간에도 일이 많지만, 성수기가 아닌 다른 계절에는 기업체 교육뿐이고 교육은 대부분 저녁 이후로 다 취침이라 야간에 일이 없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고, 고요하고 어두운 시간.

그 '최대리'는 내가 근무하는 날에는 늘 새벽 2시쯤 프런트 데스크로 내려왔다.

조용히 소리 없이 다가왔다. 손에는 책을 들고.

"최대리 님, 머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여전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수줍게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아,... 그냥.... 음.. 저 잠이 안 와서요.."

아, 귀엽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모습이었다.

"부럽네요, 잠이 안 오고. 저는 잠이 마구 쏟아져서 눈이 자꾸 감기려고 하는데 말이어요"  하품 섞인 나의 말에, 갑자기 쓰윽 그가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평소에는 눈을 못 마주치던 그였는데, 갑자기 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사시'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아 정말, 얼굴이 피곤해 보여요. 음.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그는 갑자기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후 담요와 겉옷을 들고 나타났다.

"이제 할 일은 없는 거죠? 5시에 각방 알람만 하면 되는 거죠? 제가 여기서 전화 오는 거 없나 대기하고 있을게요. 김주임님은 이거 깔고, 옷 덮고 잠깐 주무세요. 제가 혹시 누가 오면 김주임님 잠깐 화장실 갔다고 할게요" 

왜요? 왜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예요? 

왜 그저 하찮은 호텔직원 나부랭이 일뿐인 저에게 '김주임'이라 하지 않고 꼬박꼬박 '김주임님'이라고 '님' 자를 붙이는 건데요. 왜 자꾸 저를 그렇게 불쌍하게 바라보는 건데요.라고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정말 너무 졸려서 나도 모르게 덥석 담요를 깔고, 그가 건네주는 '그의 향'이 살짝 코 끝을 스치는 겉옷을 덮고 나는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