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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주 비올라 Nov 02. 2022

2-5) 다시 글쓰기

육아는 수치심의 지뢰밭

엄마가 되고, 같은 엄마들을 만나면 늘 같은 이야기가 반복된다. 남편, 시댁, 아이들 학원, 자존감, 상처 몇 년이 지나도 늘 같은 이야기이다. 사람도 다르고 기간도 다른데 항상 같이 이야기이다. 아이가 영어를 싫어해. 독박육아로 힘들어. 오늘도 아이에게 화를 냈어. 나는 좋은 엄마가 아닌가 봐. 


   <수치심 권하는 사회>에서 브레네 브라운은 우리가 상처를 받고 계속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사는 것은 바로 수치심 때문이라고 말한다. 수치심이라는 감정은 무엇일까?


‘수치심은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라들에게 거부당하고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믿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느낌이나 경험이다.’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책에서 저자는 엄마가 되고 난 후 수치심에 더욱 취약해진 자신의 사례와 많은 다양한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엄마가 되기 전에 느끼는 수치심은 오로지 나에게만 한정된다. 그러나 엄마가 되고 나면 아이의 행동까지 엄마의 수치심이 된다.


   양육에 대한 모든 책임을 엄마에게 몰아가는 사회분위기는 아이의 상태에 대하여, 엄마가 양육에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 혹은 엄마가 일관성 있게 훈육을 하지 않아서,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등 시시각각 주어지는 많은 피드백에 수치심이 가득해진다.


   저자는 “육아는 수치심의 지뢰밭”이라는 표현을 한다. 남들 눈에 어떤 부모로 보이느냐에 따라 자존감이 왔다 갔다 한다. 게다가 나의 아이가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부모인 나의 자존감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내가 생각 없는 무책임한 부모처럼 보이는 것이 싫기도 하지만, 나의 아이가 나쁜 아이로 보이는 것은 더 싫다.


   아이가 발달이 느리면, 엄마가 제대로 준비를 해주지 않은 것 같은 죄책감이 든다. 아이가 1등 하면 그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를 다른 엄마들이 열심히 경청한다. 아이가 혼자 만점 받으면 비결이 뭐냐며 엄마의 육아에 대하여 질문을 하고 그 아이가 다니는 학원으로 우르르 아이들이 이동한다.

   엄마가 되고 느끼는 수치심은 ‘엄마는 이러해야 한다’고 만들어진 경쟁적이고 불가능한 ‘완벽한 엄마’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 낸 것이다. 


   나의 경우, 아이가 유아기 일 때 기관에 적응을 하지 못해서 7세까지 가정보육을 한 경험이 있다. 이때는 정말이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은 꼬치꼬치 캐물었다. “왜 유치원을 안 다니는 거냐? 놀이학교라도 보내지 그러냐? 혹시 집에 돈이 많아서 가정교사가 오는 거냐?” 


   도서관이나 교회에 가면, 내 뒤에서 아이가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계속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유치원이 의무도 아닌데 안 갈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가 점차 아이가 유치원에 가지 못하는 게 엄마인 나의 결함처럼 생각되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가 주위에 한 명도 없어서 ‘외톨이’가 된 기분이었다.  


   이처럼 ‘외톨이’가 된 것처럼, ‘나 하나뿐’이라거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는 것 때문에 수치심은 강력한 고통이 된다. 타인에게 털어놓기가 어려워진다. 


   저자는 이런 수치스러운 경험을 이야기하고 손을 뻗어서 도움을 요청하라고 한다. 그리고 타인의 수치스러운 경험을 들어보라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이상하게 위안이 된다.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잊으려고 애써왔던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위안’은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나 하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우리에 대하여 나누기 위해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시작할까? 수치심은 감추고 싶은 감정이다. 감추고 싶은 것을 타인에게 말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나는 엄마가 되고 “아이가 귀찮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7세까지 가정보육을 할 때는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엄마인 내 탓으로 아이가 낯선 환경에 적응을 못하는 건가 싶어서 너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학교에 가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자,  나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났다. 아이가 귀찮았다. 엄마로서 해서는 안 되는 생각인데, 알고 있는데, 가끔 그랬다. 정말 가끔. 


   내가 이런 나의 수치심을 이야기했을 때, “엄마가 아이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우울증이 있나요? 엄마로서 책임감이 없나 봐요? 아이가 엄마 감정을 느낄 텐데, 아이가 불안해하지 않나요?”라는 걱정스러운 대답을 들었다. 


   알고 있다. 그분은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고, 육아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경험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던 분이다. 나는 정말 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지만, 속으로 더 강한 수치심을 느꼈다. 


‘아, 나는 정말 형편없는 엄마이구나. 왜 엄마가 된 걸까? 아이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육아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너무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잖아.’  


   그런데, 그렇게 육아가 행복한 그분은 아이에게 가끔 화를 낸다. 나는 아이가 귀찮아도 화를 내지는 않는다(정말 가끔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과거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분은 화를 내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고 육아가 좋다고 한다.


   나는 아이에게 화를 내고,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감정조절도 못하는 나쁜 엄마라는 “수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죄책감은 ‘나는 나쁜 짓을 했다’라는 행동의 문제이고, 수치심은 ‘나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존재의 문제이다.


   죄책감과 수치심 모두 자기 평가에 대한 감정이다. 그러나 수치심은 내가 무엇을 했는지 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나쁜 엄마, 나는 부족한 엄마, 나는 쓸모없는 존재라는 자기 평가는 점점 자신을 그렇게 몰아간다.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엄마는 그저 죄책감을 느끼는 엄마보다 아이에게 더 자주 화를 내게 된다.   


   그분은 어떤지 궁금하다. 화를 내고 죄책감만 느끼는 건지, 감정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라는 수치심도 느끼는 건지. 하지만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수치심을 편안하게 드러내기에 안전하고 편안한 사람이 없다면 글쓰기가 가장 좋은 친구이다.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한 글쓰기는, 과거의 고통에서 빠져나와 냉철해지는 계기가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내 경험과 나의 아픔을 재해석하게 된다. 죄책감인지 수치심인지 조금씩 구분하게 된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면 술 마시고 하던 나의 한풀이를 이야기로 쓰기 시작했다. 내가 과거에 받았던 상처들, 어린 시절의 고생과 고난들, 나의 모든 경험에 대하여 기록했다. 누가 볼까 봐 두려웠다. 이런 비참한 삶을 살아왔냐고 불쌍하게 여길까 봐 부끄러웠다. 그래서 블로그에 ‘소설’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내 얘기가 아니라고 허구라고 하고 썼다. 나 자신을 위해서 계속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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