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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18. 2020

출판번역가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

정해진 사람, 준비된 사람, 문장력과 통찰력이 이미 안정적으로 구축된 사람만이 출판번역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번역가는 번역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기 이전에 프로그램되지 않은 학습과 글쓰기의 오랜 과정을 무의식적으로 수료한 사람입니다.  

                                                                                                        《번역가 되는 법》, 김택규


중간 안착지로서가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번역이라는 세계에 뛰어드는 지금 우리 세대의 번역가가 가장 간과하는 역량이 글쓰기 능력이 아닐까 싶다.


소설가나 시인의 길을 걸으려다 번역으로 돌아선 과거 세대에게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능력이 지금 우리 세대에게는 아무래도 부족할 수밖에 없는데 지금의 세대는 기능인적인 태도로 번역에 다가가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가라면 단순한 기능인 이상의 역할이 요구되는 순간에 마주할 수밖에 없다. 번역은 저자의 글쓰기를 창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하나의 관계를 구축해 나아간다는 면에서 글쓰기의 한 행위임이 분명하므로 번역가라면 글쓰는 연습에 들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글을 쓰면 문장력이나 논리력이 향상되는 것은 물론 자신만의 문체라는 것이 확고해진다.  


번역가에게 문체는 상당히 중요하다. 대학원 시절 늘 깨지기만 했던 한 번역 수업에서 딱 한 번 칭찬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건 내 문체가 그 번역문에 참 잘 어울린다는 거였다. 잡지에 실린 여행 에세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사람의 문체란 그 사람만의 반복적인 어휘 사용이나 언어의 리듬감 따위가 버물려져 자연스럽게 형성된 결과이기 때문에 나만의 문체를 정립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글을 써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번역가는 자신의 문체와는 다른 문체를 흉내 내야 할 때가 많다. 의뢰받은 책이 늘 나의 문체에 부합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내 문체가 제대로 반영된 책을 진행한 적이 그다지 많지 않다.


따라서 격이 높은 문체도, 딱딱한 문체도, 부드러운 문체도 자유재로 구사할 줄 알아야 하는 게 번역가다. 다양한 글을 다루다 보면 자연히 길러지는 능력이다. 나의 목소리를 제거하는 법은 우선 나의 목소리를 내는 법을 알고 나서야 어렴풋이 다가오는 건지도 모른다.  



번역가가 글을 써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기획서 때문이다.


기획서는 번역가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다. 내가 원하는 분야의 책을 번역하고 싶은 이에게 기획서는 "내가 원하는 게 이것이오."라며 갑을 향해 곧장 들이대는 방법이다. 정체성이 뚜렷한 번역가에게는 주는 일만 받아 일하는 것만큼 고역도 없을 것이다. 기획서를 한 번도 성공시킨 적이 없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기획서가 "나에게 맞지 않는 정체성의 틀에서 헤어 나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믿는다.


기획서를 작성할 때 필요한 기획력과 문장력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쌓인다. 글을 쓰는 사람은 결코 자기 안의 것만 쓰지는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아웃풋을 소화해내는 과정을 통해 번역가는 새로운 시각과 창의력을 얻게 되고 이로써 다른 번역가와 차별화될 수 있을 만큼 몇 단계 성장을 거듭한다.


지금은 번역가의 역할이 과거보다 축소되어 말 그대로 '번역'만 하는 젊은 번역가들이 많지만 번역가가 수동적인 기능인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본다. 굵직한 에이전시에 채가지 않은 소설들도 아직 한가득이다. 물론 하루치 작업 분량이 당장의 수입과 결부되는 현실에서 가시적인 성과와 연결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에 매달리기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역서가 늘어가는 번역가라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어본 번역가라면 한 번쯤 고민해볼 문제다.  




번역가의 작업물은 최종적으로 '글쓰기'라는 형태로 독자에게 다가갈 수밖에 없다. 별다른 직급이 존재하지 않고 다른 팀원들에게 무임승차할 수도 없는 이 세계에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려면 결국 답은 하나밖에 없는 셈이다.


글을 쓰는 동안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하물며 그게 내가 하는 일에도 도움이 된다면 글을 써야 하는 이보다 확실한 이유가 어디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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