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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May 10. 2020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일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

오늘도 책을 번역한다.


하루치 정해진 분량을 꼬박꼬박 해나가면서 하루의 뼈대를 세운다. 그건 지겨운 일이 아니라 나를 살게 하는 일이다. 하루의 루틴이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내가 반복적으로 행하는 일이 나를 규정할 것이다.




한 권의 책을 번역하는 일은 책임감이 필요한 일이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는 사람처럼 책을 덥석 받고 도저히 못하겠다며 그 책임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도망가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나에게는 책의 그 막막한 길이감이 주는 안정감 같은 게 있다. 겨우 내 먹을 도토리를 쟁여 놓은 다람쥐의 마음이랄까. 하나의 책을 2, 3달 품고 있는 동안은 돈을 얼마나 벌든 든든하다.


기술 번역이나 영상 번역과는 달리 호흡이 길기 때문에 아이들을 돌보면서 하기에도 좋다. 급한 일이 생겨 하루를 쉬더라도 다음 날 조금 더 하면 되니까, 주말에 보충하면 되니까 내 스케줄대로 진행할 수 있으니까.


어떠한 책이든 처음 받을 때에는 설레고 만다. 이 책과 함께할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된다. 누군가의 지시를 받지도, 쓸데없는 회의에 낭비하는 시간도 없는 이 고요한 작업이 좋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건 내 머릿속뿐이다.


글을 써보기 전까지는 어떠한 문장이 나올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듯 번역을 해보기 전까지는 내가 어떠한 문장을 써 내려갈지 알 수 없다. 머릿속으로 대충 해석을 해 놓더라도 막상 말이 되게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일에는 품이 든다. 원문의 언어를 모르는 이들이 가능한 머리를 덜 쓰고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려고 애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 원문을 사서 보는 사람이 많아진 데다가 원문과 번역서를 놓고 비교하며 공부하는 독서클럽까지 생긴 지금이 조금 무섭기도 하다.


가끔 인스타나 블로그 등을 통해 내가 번역한 책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번역에 대해 언급하는 글을 볼 때면 볼이 빨개진다. 부끄러울 때도 많지만 그냥 다시 묵묵히 내 공부를 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린다.




책을 번역하다 보면 1년을 계절로 나누는 게 아니라 몇 권의 책으로 나누게 된다. 12달을 계절의 흐름으로 기억하기보다는 한 권의 책을 마감할 때, 혹은 또 다른 책을 시작할 때로 기억하는 것이다.


허나 인생은 마감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므로 책 속에 잠식되지 않도록 거리를 둬야 한다. 보다 큰 동그라미를 그려야 할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곁에 있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는 내일도 또 번역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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