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기다리는 마음

by 물고기자리

책을 좋아하는 나에겐 해외에 사는 게 고역이다. 한국에서 책을 배송받으려면 시간과 돈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원서를 상대적으로 빠르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기도 하지만 모국어로 적힌 책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위로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알라딘 앱을 누르고 장바구니를 클릭한 다음 언제부터인가 늘 최소한 80권 정도 그곳에 담긴 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책 중 신중하게 네, 다섯 권을 골라 결제를 한다.


요즘에는 그 주기가 부쩍 짧아졌는데 몇 개월에 한 번 주문하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최근 들어서는 1주에 한 번 꼴로 줄어들어 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스트레스는 높아지고 읽고 싶은 책은 늘어만 가는 탓이리라.




나에게 독서는 쾌락에 가깝다. 책에서 생의 에너지를 흡수하는 나는 책장에 가지런히 꽂힌 책 등을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굳이 비싼 배송비를 부담해가며 종이책을 주문하는 이유다.


효율성 하나만 놓고 보면 최고의 가성비를 자랑하는 전자책은 밑줄을 쭉 긋고 싶다거나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싶을 때면 초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전자책의 한 템포 느린 하이라이트 기능, 만질 수조차 없는 표지 따위는 책을 읽는 기분을 한껏 아래로 끌어내리고 만다.


손으로 책을 쥐고 책장의 두께 변화를 느끼며 읽는 이의 '이동 감각'을 전자책으로 느끼긴 어렵다...... 전자책을 보는 중엔 책을 텐트처럼 엎어두고 물끄러미 표지 보기를 할 수 없다. 책 모서리를 일없이 매만지며 읽기, 이따금 되돌아가거나 앞서가기, 걸은 곳에 나만의 표식을 얹어두기 등을 할 수 없다. 영 섭섭하다.

《모월모일》, 박연준


내 삶이 그렇지 아니한 것처럼 내 책 세상은 효율성이라는 힘에 의해 지배받기를 거부하는가 보다.


책장에 모셔둘 책이라는 확신이 오는 순간, 붙였두었던 포스트잇을 전부 떼어내고 속시원히 연필로 밑줄을 쓱쓱 긋는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어도 소심하게 얇은 포스트잇으로 표시하는 것에 만족하던 내가 과감히 연필을 갖다 대게 된 것은 꾹꾹 그어보지 않고는 문장이 내 안에 새겨지지 않게 된 이후부터였다.

“어떤 문장 아래 선을 그으면 그 문장과 스킨십하는 기분이 든다.”는 김애란의 말처럼, 내가 선을 그음으로써 나와 스킨십을 나눈 책은 전과는 전혀 다른 책이 된다. 서점에 진열된 그 어떤 책과도 다른 나만의 책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문득 펼쳐든 책 속에서 무수히 많은 밑줄이 나를 향해 쏟아질 때면 선을 긋던 날 내 마음의 온도까지 고스란히 전해지곤 한다.



아침에 주문해서 저녁에 받는다는 총알배송의 시대이지만 책을 기다리는 마음만큼은 모두가 서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최대한 아끼고 또 아껴서, 그렇게 간절하게 책을 기다렸으면 좋겠다. 저마다의 마음으로 책을 기다리는 수많은 애서가가 존재하는, 그래서 그만큼 다양한 책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좋아하니까.


책을 받는다는 건 한 사람의 인생을 받는다는 것이므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오는 것이므로.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오늘도 책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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