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는 소설이 있다.
푸른 숲 위로 난 흰 선들. 그 표지가 여름에 참 어울린다 싶어 펼친 이 소설이 나에게 해 준 일이었다.
도망치듯 건축에서 빠져나온 나에게는 이 소설을 읽는 데 조금의 용기가 필요했는데, 나의 머뭇거림과 주저함을 알았던지 소설은 첫 문장부터 나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풀어주었고 그렇게 나는 소설이 내미는 손을 기꺼이 맞잡고 한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언제부터 일본 소설을 잘 읽지 않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어수선한 일상과 동떨어진 듯한 온화한 세계를 정감있게 그린 에쿠니 가오리나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을 찾지 않게 되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건축과의 연을 접고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 무렵과 어렵풋이 겹치는 면이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헐레벌떡 빠져나온 나의 한 때를 뒤돌아보는 일을 외면하곤 했는데, 그 시절 나와 함께 한 소설들마저도 그 속에 화석처럼 묻혀버리고 말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소설을 통해 치유를 받던 그 시절의 나는 살아 남아 나의 일부를 이루었고 그렇게 거의 20년 만에 나는 이끌리듯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조금 지루할 수도 있겠다 싶을만큼 세세한 묘사를 보며 건축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경험이 갖춰있지 않는 한 불가능한 묘사가 아닐까 싶었는데, 옮긴이의 부연 설명이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이과 과목이 안 돼어 단념했지만 건축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관련 서적도 곧잘 읽었던 작가는 오랜 세월 마음속에 축척했던 것을 끌어냈다고 한다.
대부분의 소설가가 결국 자신 안의 것을 끌어내게 되어 있지만 이런 세밀함과 깊이감은 아무나 연출할 수 없는 경지일 테다. 단순히 건축에 대한 얘기뿐만 아니라 자연, 음식,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에 혀를 내두르게 만드는 경지.
이 책을 읽는 내내 스무 살의 내가 생각났다. 꿈을 이뤄보려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던 나와 조금씩 꿈에서 멀어지며 위태로운 길을 가던 나. 이제는 그 모습마저도 다 소중히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길을 열어준 셈이다.
모든 일에 있어 나는 늘 마음을 따랐을 뿐이었고 아무리 주어진 상황이 그렇다 해도 결국 최종 선택을 내린 건 나였다고. 이제 와 피해의식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건축가는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기술자이며 직공이고 다른 직업이 누리지 못하는 광범위한 세계에서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을 보며 내가 도망치듯 건축을 포기한 것은 아마 이 광범위성이 주는 무거움 때문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든다.
냉정한 현실은 책에서 그리는 섬세한 세계, 착한 사람들만 살 것 같은 유리처럼 투명한 세상과는 다르다.
나와는 달리 건축을 포기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까지 와서 결국 꿈을 이룬 신랑의 일상을 들여다 보아도, 그림 같은 소설 속 설계사무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박봉에 늘 밤샘작업에 시달리는 한국의 설계사무소와도 한참 다르고. 작가는 비현실적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1980년대를 배경으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던지는 아름다운 문장에 나는 또 다시 홀딱 빠지고 만다. 피톤치트가 가득한 푸른 숲에 막 다녀온 것처럼 또 다시 치유받고 만다.
"오래전부터의 '마을 사람'들은 과거의 아오쿠리 마을을 기억속에 보관해두었다가 가끔 꺼내 그리워했다." 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나도 한 때 다른 꿈을 꾸었던 과거의 기억을, 그리고 지금 이 책을 읽은 기억을 가끔 꺼내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직 작가의 다른 책을 읽어보지 않아 섣불리 마쓰이에 마사시를 좋아한다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책만은 좋아한다 말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