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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Jun 19. 2020

되고 만 샘플 번역

새로운 책을 시작한다.


간만에 예전에 일하던 에이전시와 작업하게 된 것인데, 다른 곳에 비해 번역료가 낮아 의뢰가 올 때마다 망설이던 곳이었다. 샘플 번역에 참여해야 했지만 타이틀이 흥미로워 보였던 터라 하겠다고 했는데 덜컥 되어버린 거다.




그런데 출판사 피드백이 흥미로웠다.  


20~30대 젊은 층을 핵심 독자 대상으로 삼은 소프트한 교양서적에 맞게 요즘 독자들의 언어로 번역해주신 것 같다는 피드백이었다.


사실 난 모르는 상태로 진행한 샘플 번역이었다. 그냥 내 스타일대로 번역한 건데 아직까지 간신히 30대라 할 수 있는 내가 그래도 젊은 층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니 다행이지 싶었다. 그런데 요즘 독자들의 언어란 무엇인가. 내용이 다소 어려웠던 터라 어려운 말을 쉽게 풀어서 썼던 건데 그게 요즘 독자들의 언어였단 말인가. 하긴 요새는 사람들이 하도 책을 안 읽어 교양서적도 점점 쉽게 쓰는 트렌드인 것 같긴 하다.


물론 모든 책이 그럴 수는 없을 것이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독서 인구가 점점 줄어드는 지금 그나마 책을 읽는다는 20, 30, 40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하는 시장은 분명 마지막 잠재력이 존재하는 곳일 것이다. 그들을 타깃으로 하는 시장에 내 문체가 맞는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도 없을 테고.


글도 늙는다. 나이가 들어서도 신체 나이는 젊게 유지할 수 있는 것처럼 나의 "글 나이"도 가능한 젊게 유지하고 싶다. 꼰대의 말투로 독자들에게 외면받는 글이 아니라 연륜의 깊이를 탑재하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권남희 번역가나 박산호 번역가의 글처럼.


어쨌든 그동안 브런치에 글을 쓰고 또 요즘 새대의 작가들이 쓴 글들을 읽은 보람이 있는 것 같아 살짝 기분이 좋았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된 이후에 진행한 두 번째 책인데 확실히 글을 써보기 전과 후, 번역하는 자세나 속도에 있어서 달라진 게 느껴진다.


그 후 같은 에이전에서 곧바로 또 다른 책의 샘플 번역을 진행해보겠냐며 책 링크를 걸어왔는데 맙소사, 내가 예전에 뉴욕타임스 북리뷰에서 보고 기획서를 써 볼까 고민했던 책이었다.


아, 망설일 수조차 없었던 나는 밀당도 하지 못한 채 바로 승낙해 버렸다.


이렇게 또다시 에이전시에 코가 꿰이나 싶어 불안했지만 이런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출판사들과 직거래할 때에는 대부분 자기 계발서나 경제, 경영서를 맡는 터라 내가 원하는 책을 번역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 그래서 기획서를 작성하려 하는 건데 그런 지난한 과정 없이 이렇게 내 앞에 떡 하니 원하는 책이 떨어진 상황이니 자존심이고 뭐고 챙길 때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이 에이전시에서는 나에게 계속해서 번역을 의뢰했다. 내가 1인 출판사들과 손을 잡으면서 요 몇 년 사이 의뢰를 거의 거절했지만 담당자는 늘 잊지 않고 번역 의뢰 메일을 보내왔었다. 하지만 딱히 입맛에 당기는 책도 없었고 일단 돈이 더 급했던 나는 대부분 외면하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보내주는 링크에 꽤 괜찮은 책들이 담겨 왔고 그중에는 시간 여유만 된다면 번역해 보고 싶었던 책들도 있었다. 나의 역서가 늘고 번역 실력도 느니 괜찮은 책들을 보내주기 시작한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이참에 내가 하고 싶은 책이나 해보자며 내가 원하는 분야를 적어 담당자에게 보냈다. 이런 분야의 책들이 있으면 소개 부탁한다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던져진 구원의 손길로 새로운 활기를 얻은 기분이다. 며칠 전 큰맘 먹고 내 책상을 마련했는데 배송을 기다리는 가운데 좋은 일들이 연속으로 생기니 말이다.


번역료가 아직은 성에 차지 않아 계속 상승 요청 중이지만 내가 잘 해내는 모습이 입증되면 더 오를 거라 본다. 꾸준히 쓰고 읽어야 할 이유가 또 생긴 셈이다.


다가올 여름이 살짝 두근거리는 걸 보면 난 정말 번역을, 이 일을 좋아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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