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마음

내가 책을 읽는 이유

by 물고기자리
단순히 '꽃잎이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삶과 그렇게 떨어지는 꽃잎 때문에 '봄이 깎인다'라고 이해하는 삶은 다르다고. 문학은 우리에게 하나의 봄이 아닌 여러 개의 봄을 만들어주며 이 세계를 더 풍요롭게 감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종이를 동그랗게 구기면 주름과 부피가 생기듯 허파꽈리처럼 나와 이 세계의 접촉면이 늘어난다고 했다.
《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꼬꼬마 시절, 언니와 함께 아빠의 양손을 한쪽씩 잡고 교보문고를 나서던 기억, 버스를 기다리며 군것질을 하던 기억, 내가 기억하는 첫 봄은 그렇게 왔다. 책과 함께 한 봄이었고, 나는 그 후로도 책 덕분에 여러 개의 봄을 감각할 수 있었다.


모든 독서는 이야기를 훔치는 일, 자아가 확장되는 경험이다. 중학생 시절 동네 책방에서 한 권에 500원, 1000원에 빌려와 가족 모두가 읽은 퇴마록이나 태백산맥》은 나의 자아를 확장시켜 주었고, 사춘기 특유의 은밀한 상상력으로 푹 빠져 읽은 《다락방에 핀 꽃들》은 이야기를 훔치는 경험을 주었다.



책을 향한 짝사랑이 잠시 시들했던 적도 있었다. 20대 초반, 나는 가만히 앉아 조용히 책 속 세상을 들여다보기보다는 바깥세상을 온몸으로 경험하고픈 마음이 컸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보다 내 안의 목소리가 더 컸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방황을 끝내고 내가 돌아온 곳은 결국 책이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준 건 나였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고, 책의 영향력은 자주 상찬되지만, 때로 책의 역할은 딱 여기까지다. 책이 삶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꽤 높은 문턱을 넘어야 한다.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우리는 삶으로 돌아오고, 책은 거기서 끝난다. 세상은 책 바깥에 있다.... 훌륭한 책을 읽는다고 삶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시간은 없고, 잘하고는 싶고》, 김성광


우리는 간혹 책을 읽는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자신을 마주한다. 훌륭한 책을 읽는다고 내가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건만 나와 책을 동일시한다. 책이 지닌 양면성에 혹하고 만다.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 독이 될 수도 있는 책, 나의 삶으로 이어지기에는 문턱이 높은 책들도 많다.


허나 진짜 독서는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잠시 훔친 남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나의 테두리를 확장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떨어지는 꽃잎을 보며 '봄이 깍인다'고 이해하는 삶으로 확장되어가는 나를 보는 게 좋다. 아직도 내가 눈치채지 못한 여러 개의 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를 또다시 책으로 이끈다.


내 안의 나에게 갇히지 않기 위해, 모른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내가 되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




책처럼 선물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 경우가 많은 사물도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이라고 상대에게도 좋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 마음에 건네진 책은 때때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선물 받은 책은 옷이나 액세서리처럼 교환하기도 애매하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선물 받을 때의 기분을 가장 좋아한다. 베스트셀러라는 이유로 같은 책을 두 번이나 선물 받은 적이 있지만 그래도 좋다. 누군가가 날 생각해서 골랐을 테니까, 책을 좋아하는 나를 생각했을 그 마음이 고마우니까.


책은 나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유일한 사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