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정

나를 지탱해주는 장소를 찾아서

by 물고기자리
나는 장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어떤 장소에 대한 애정을 이야기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 대한 본인의 애정을 이야기하지만, 장소가 되돌려 주는 사랑, 장소가 우리에게 주는 것에 대해서는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어떤 장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다정한 위로를 건네고

어떤 장소는 함께할 어떤 날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흐뭇함을 안겨주며

또 어떤 장소는 그 광활함으로 좁은 세계에 갇힌 나의 편협한 마음을 치유해준다.




우리에게는 집 앞의 나무나 풀, 벌레처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자연과, 알래스카나 아마존처럼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자연이 있다. 이곳의 삶에서 허덕일 때면 내 손이 닿지 않는 자연이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그런 미지의 장소가 주는 위로가 있다.


가보지 못한 여행지 역시 우리에게는 하나의 장소로 다가온다. 간혹 그런 사치가 깃들어야 삶은 살만해지므로 나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무수한 여행을, 그 장소를 욕망한다.


나에게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장소도 있다. 그곳은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 내리막길이 처음 내 눈 앞에 펼쳐진 순간, 주책맞게 눈물이 났었다. 아지랑이가 아스팔트 건널목 위를 가만히 건너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뻗어있을 것만 같은 아스라한 내리막길. 그건 한국의 익숙한 풍경과 닮아 있었다. 그 풍경을 쪽지처럼 고이 접어 집으로 온 나는 나에게도 만나러 가야 할 풍경이 생겼음에 안도했다.


관찰이라는 행위에는 정말 사랑이라는 성분이 들어 있나 보다. 그 날 내리막길을 가만히 주시하던 찰나에 나의 눈은 사랑에 빠진 자의 그것처럼 잠시 반짝였던 것도 같다.


집을 짓는 자가 그 땅의 임자가 되던 시절, 장소란 어떤 의미였을까. 분명 지금처럼 사유화된 장소, 물질적인 가치가 때로는 더 부각되는 장소와는 성격이 달랐을 것이다. 그런 시절에 살아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다.


선을 긋고 여기부터 저기까지 다 내 땅이라 말하는 아이들의 놀이처럼 그렇게 순식간에 내 장소를 세울 수 있다면 나는 어떠한 장소를 만들까. 누군가 만들어놓은 장소에 들어가는 것과 내가 어떠한 장소를 처음부터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경험이리라. 장소를 만든다는 건 특권임에 분명하다.





학생들에게 본인을 계속 지탱해 줄 장소를 찾기 시작해야 할 나이라고 이야기했다. 장소가 사람보다 더 믿을 만하고, 가끔은 사람보다 더 오래 관계가 유지되기도 한다고 말이다.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뉴욕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부모님과 함께 다 같이 월든 호수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거 하나만을 보려고 근처에 숙소까지 잡고 1박을 한 여정이었다. 그때에는 참 심심한 여행이었다 생각했는데 잔잔한 물살 위로 가만히 내려앉던 따스한 겨울 햇살 같은 것으로 기억되는 그 호수는 몇 년이 지난 지금 종종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울렁이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나를 다시 찾아오는 장소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장소를 찾아다니는 여정이 아닐까. 그렇다면 똑같은 장소에 두 번 가는 건 분명 낭비가 아닐 거다. 갈 때마다 안부를 묻는 장소를 많이 쌓아두는 사람은 말 그대로 비빌 구석이 많은 자일 테고.


내가 이 땅에서 사라지고 난 뒤에도 나와 살아생전 오랜 관계를 유지한 어떤 장소에 나의 흔적을 조금은 묻어두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장소란 그런 것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장소를 더 많이 찾고 싶다. 한눈에 다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너른 장소도, 내가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작은 장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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