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이다 하는 감각

by 물고기자리

집 구경을 좋아한다. 천편일률적인 한국 아파트와는 달리 브루클린 집들은 평면도 구조도 제각각이다. 제 버릇 남 주지 못한다고, 아무리 내다 버린 전공일지언정 공간에 대한 호기심만큼은 버리지 못해 나는 어떠한 공간을 보면 그 안에서 생활할 누군가를 상상하고 동선을 그려본다. 본능이 시키는 일이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그리하여 누군가의 집 앞까지 갈 일이 생기면 으레 받는 질문, 상대는 예의상 꺼냈을지도 모르는 말을 나는 덥석 문다.


그러면 잠깐만 실례할게요...


가족만의 내밀한 공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 가족만의 정취가 오감을 파고든다. 가족만의 일상과 습관, 기호와 취향 같은 것들이. 나는 공간을 재빨리 스캔한다. 집의 구조와 그 안에 놓인 가구, 소품까지. 이 집은 도대체 몇 층이야. 이렇게 비싼 집에도 쥐가 나온다고? 수집한 정보를 머릿속에 차곡차곡 입력한다. 흡사 스파이처럼.


그렇게 남의 집을 열심히 구경하고 다닌 결과, 해외생활 8년 차 만에 드디어 내 집을 장만했다. 그리고 그동안 맺힌 한을 풀겠다는 듯, 영혼이라도 갈아 넣을 듯 집을 꾸미는 데 열을 올렸다. 여긴 내 집이니까. 드디어 장만한 우리 집이니까.


그런데 집을 꾸밀수록, 손을 볼수록 뭔가 어긋나는 듯한 상황에 이르자 의문이 들었다. 이곳은 진짜 내 집일까? 그러니까 문서가 보장하는 의미로서의 내 집을 떠나 내가 이 집을 진짜로 소유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한 일이긴 할까? 내 집이란 감각은 도대체 어떠한 형상일까?



그 무렵 한국에 다녀온 친구가 집에 놀러 와 하소연했다.


넌 여기가 내 집이다, 하는 느낌이 있어? 난 그게 없어서 힘든 거 같아.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민하는 친구를 보며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열 번, 백 번 생각해봐도 나에게 집은 ‘미국’이다. 해외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 출입국 창구에서 담당자가 도장 쾅 찍어주며 건네는 말이 나는 제일 반갑다.


Welcome back!


비록 쥐들이 득실대고 바퀴벌레가 와글대던 건물이었어도 내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있었다. 나의 장소성, 나의 정체성은 이곳에 있었다. 소유하지 못했어도 내 집이라는 느낌은 늘 존재했다. 내 집이라는 감각에서 소유는 전제조건이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느낀 ‘내 집’이라는 희뿌연 감각의 정체를 밝혀보려고 내가 거쳐온 집들을 돌아봤다. 지난 시절 나에게 집은 꾸밈보다는 생존의 기본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곳이었다. 바퀴벌레 없는 집, 쥐가 나오지 않는 집, 세탁기 있는 집 같은 조건이었고 그 조건들은 쉽게 충족되지 못했다.


마음에 안 드는 집, 쫓기듯 떠나야 했던 집, 불편한 집으로 남아버린 집들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꺼내보니 알겠다. 억울함이 북받친 날에도, 성질이 버럭 나는 날에도, 해외살이의 서러움에 분노가 폭발한 날에도 집을 향한 애정이 조금씩 싹텄단 걸. 친구가 묻던 내 집 같은 느낌은 아이러니하게도 애증이 만들어낸 애착이었다.




처음에는 집이 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맘에 들던 들지 않던 쭉 안고 가야 하는 존재라고. 지금도 집은 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만 조금 다른 의미에서다. 집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필요한 건 나이 드는 몸이 그렇듯 고쳐 쓰고 아껴 쓰는 일이라고. 완벽해 보이는 집은 있지만 완벽한 집은 없다고. 우리가 진정으로 집을 소유하는 순간은 어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집을 통해 나를 알아간다거나 집이 곧 나다, 같은 말은 조금 피곤하다. 집은 그냥 집으로만 존재했으면 좋겠다. 나의 취향이 반영되면 좋겠지만 굳이 그러지 못하면 또 어떤가. 우리의 삶이 그렇듯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뭔가를 조금 더 해보겠다는 으쌰 으쌰 한 마음 사이 어디쯤인가를 헤매며 우리는 다음 집으로, 또 다음 집으로 옮겨가며 사는 것 아닐까. 집은 그저 우리가 잠시 살다 가는 곳일 뿐이다.


지난 8년 동안 거의 2년마다 사는 곳을 옮겨가며 생각한 것들을 담았다. 둘에서 셋, 셋에서 넷이 되는 동안 집이라는 공간이 의도치 않게 빚어낸 자그마한 성장담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첫 집이 완벽했다면 성장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는 묘한 위로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