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전 신랑을 만나 처음 함께 살게 된 집은 뉴욕 퀸스, 아스토리아에 자리했다. 퀸스로 말할 것 같으면 뉴욕 내 다섯 개 자치구 중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젊고 돈 없는 이방인들이 방 하나를 빌려 함께 사는 경우가 흔했다. 신랑 역시 중국인이 소유한 타운하우스 3층에서 오래전부터 룸메이트와 살고 있었다(이곳의 타운하우스는 말 그대로 하우스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는 형태일 뿐 우리가 상상하는 타운하우스와는 거리가 멀다). 룸메이트와 살아본 적 없던 나에게 룸메이트란 존재는 생경했다. 처음에는 가족이 아니기 때문에 눈치 볼 필요도 없고 그저 공간만 공유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착각이었다.
냉장고를 열 때에도, 변기 물을 내릴 때에도, 방 밖으로 나갈 때에도 신경이 쓰였다. 상대의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삐거덕 마룻장 소리 하나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복도나 부엌에서 마주칠 때마다 과장되게 반가워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나름 아무 하고나 잘 어울린다고 자부했지만 공통분모라고는 동시대에 뉴욕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라는 사실뿐인 나보다 여섯 살 어린 남자아이와 무슨 얘기를 그토록 신나게 하겠느냐는 말이다.
비싼 월세를 감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다지만 주거의 질은 현격히 떨어지는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셰어하우스처럼 아예 처음부터 공유를 전제로 시작하거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두 분처럼 마음 맞는 사람끼리 뭉친 것과는 달리 순전히 필요와 공급에 의해 이루어진 계약 관계였다. 각자에게 할당된 공간에 몸을 뉘인 뒤 서로의 눈치를 적당히 보아가며 화장실을 사용하고 부엌을 이용하는 삶이었다.
상황을 타계할 유일한 방법은 나가는 거였다. 그 아이 역시 어지간해서는 외출을 하지 않았기에 거실에 쳐 놓은 커튼 너머로 상대의 숨소리가 들릴락 말락 하는 집안 공기가 지나치게 텁텁하게 느껴지는 날이면 내가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무거운 노트북을 가방에 욱여넣고 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 맨해튼으로 나갔다. 모두가 맥북을 사용하는 커피숍 한가운데 앉아 LG 노트북을 당당하게 펼친 채 번역을 했다. 신랑의 퇴근 시간까지 한 곳에 죽치고 앉아 물결을 거스르는 한 마리의 도도한 새처럼 한글 자판이 달린 노트북을 타다닥 두드리며 하루를 보냈다.
퇴근한 신랑과 함께 들어가면 낮의 공간이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 아이와 나 사이의 불편한 긴장이 조금은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나는 뒤로 스르륵 물러나고 주연 자리에 신랑을 슬쩍 세워놓으면 될 것 같은.
그 공간의 주인은 절대로 내가 아니었다. 내가 오기 전까지 작은 방 하나에 첫 월급으로 산 엄청나게 큰 모니터를 들여놓고 잔뜩 신이 나 있던 신랑도 물론 아니었다. 주인 없는 공간들의 집합은 위에서 내려다보면 짜깁기한 직물처럼 보였을 터였다. 그 공간이 조금 서글펐던 건 어느 것 하나로도 수렴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각자의 욕망과 열기가 뒤엉켜 나름의 고유한 공기를 형성했겠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주요 성분은 불편함이 분명했다.
절대로 한 가족의 공간이 될 수 없을 것만 같던 그 공간은 룸메이트가 나간 뒤 우리 가족의 집이 되었다. 우리는 그 아이가 쓰던 방에 베인 담배 냄새를 빼고 우리만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나는 그 집에서 두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까지 했다. 신랑과 새로운 집에서 산뜻한 출발을 하고 싶었지만 어쩌다 보니 4년 넘게 살았다. 한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키우고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하고 낳고 키우고. 내가 지워지지 않도록 악착같이 내 일을 붙들고. 한 때로 뭉뚱그려 서술하기에는 너무 많은 서사가 담긴 시절을 건넜다.
쥐가 나오지 않았다면 더 오래 머물렀을 수도 있었던 우리의 첫 집. 우리의 처음을 가장 많이 목격한 집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에 따뜻한 등불 같은 게 환히 타오르는 기분이다. 신랑이 내가 싸놓은 출산 가방을 깜빡하고 놓고 온 1층 계단이며, 둘째 아이를 낳은 뒤 이틀 만에 집에 온 나를 어색하게 내려다보고 있던 첫째의 표정이 둥둥 떠 있는 층계참이며. 훅 하고 떠오르는 먼지처럼 순간 불쑥 치솟는 추억들이 많다.
룸메이트가 나간 뒤 인테리어를 바꾸지도, 집을 수리하지도 않았다. 저렴한 가구들뿐이었고 내 책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룸메이트가 나가자 그곳은 조금씩 집다운 집으로 바뀌어갔다. 지금 돌아보면 그 안에는 마음이 있었다. 열정이. 온기가. 새로운 가족을 향한 몽실몽실한 무언가가 싹트고 있었다. 이제와 다시 소환하려 해 봐도 쉽사리 점화되지 않는 감정이. 지금은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가구들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시절이 청춘이었고 그건 아무리 화려한 인테리어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아이도 지금쯤 어떠한 형태로든 자신만의 보금자리라 할 수 있는 공간을 점유한다면 좋겠다. 그 시절 커튼 너머의 불편함은 나만의 몫이 아니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