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는 2평 남짓한 발코니가 있다. 애초에 이 집을 택한 건 이 발코니 때문이었다. 집을 선택하는 일은 매일의 풍경을 선택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런 풍경이라면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여름 초입에 이사했던 터라 막상 발코니에 나와 앉아 있던 날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맨살에 닿는 바람의 기온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느덧 8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몇 번 사용하지 않은 아이들 풀장을 치우고 소파를 놓았다. 아웃렛에서 한눈에 반해 충동구매한 소파였다.
다음 날 아침, 식구들이 아직 깨지 않은 이른 시간, 책 몇 권을 들고 발코니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긴 연휴 사이에 낀 일요일이라 조용했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누가 지나갈까 싶었지만 길만 건너면 공원인 터라 평소에도 걷거나 달리는 사람이 많은 동네답게 그 시간에도 부지런한 이들은 있었다. 오르막길을 향해 힘차게 자전거 페달은 밟는 이들, 개를 산책시키는 이들도 보였다. 손에 들린 책들보다도 살아 있는 그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여름 내내 두 아이를 돌보며 내 일을 하느라 하루는 숨 돌릴 틈도 없이 흘러갔다. 발코니에 앉아 있는 동안 눈앞에 보이던 자전거의 페달처럼, 천천히 달리는 러너의 몸짓처럼, 내 삶의 속도가 서서히 늦춰지다가 멈춰서는 게 느껴졌다. 뭐든 빨리 해치우려는 성향이 짙은 나에게 흔치 않은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침마다 아이들이 깨기 전에 발코니로 나갔다. 책상 스탠드를 켜고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대신 밖으로 나갔다.
엄마가 너네 때문에 아침형 인간이 되었네.
아이들 때문에 이른 아침 시간을 이용해 집중이 필요한 일을 해치우곤 했던 나를 보고 신랑이 말했었다. 아침의 발코니를 경험한 후 나는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나를 위해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모든 소란이 떠오르기 전 아주 잠깐의 시간이지만 내가 선택한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건 순전히 내 욕심이다. 아이들이 태어난 뒤 널찍한 집을 찾아 뉴저지로 가는 사례가 주위에 많다. 하지만 나는 걸어서 마트에 가고 커피숍에 갈 수 있는 동네가 좋다. 집을 선택할 때에는 하우스나 콘도 같은 주거 형태도 중요하지만 내가 도시와 전원 중 어느 쪽을 선호하는지도 잘 따져봐야 한다. 나는 자연을 끼고 있는 도시라는 풍경을 선택했다.
누구든 태어난 곳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가 머물 곳을 선택할 수는 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어떻게 지금의 삶을 더 잘 누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삶에 정성을 들이고 싶은 마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은 태도. 낯선 이방인으로 이곳에 살고 있지만, 여전히 위태위태한 생활의 연속이지만 그러한 태도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내리고 살 수 있다. 친구가 물었던 '내 집'이라는 감각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 아닐까. 아무리 원망스럽고 못마땅할지언정 우리에게 돌아갈 집만 있다면 말이다.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이 집에 들어올 때 나는 빈티지 가구들을 몹시 탐냈었다. 티크재로 만든 장식장과 커피 테이블로 채워진 우아한 집을 상상했다. 예산 초과로 결국 꿈에 그쳤지만 그때 내가 탐냈던 건 가구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애써 쌓아 올린 시간에 가까웠다. 그런 가구를 들이면 그럴싸해 보일까 봐. 역사가 있고 묵직해 보일까 봐.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남의 걸 빌려와 전시한다고 생기는 게 아니다. 이제는 안다. 그런 가짜 역사보다는 짧지만 유일무이한 우리 가족만의 다정한 역사가 더 귀중하다는 걸. 그 생동감 넘치는 역사야말로 진짜라는 걸.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는 발코니에 내어놓은 화분들이 픽 쓰러진다. 야심 차게 사온 고추나무에서 더 자라야 할 고추가 떨어지기도 한다. 그걸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내가 아무리 발악해도 지킬 수 없는 것들이 있으니 그냥 받아들이라는 자연의 가르침 같아서. 생의 에너지가 느껴져서. 우리가 사는 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잠시 살다 가는 것뿐. 집을 뜯어고칠 수는 있어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집의 주인은 집 자체인지도. 사는 동안 에너지의 결을 맞춰갈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곧 아이들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금세 떠들썩해지겠지만 집은 아이들의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 이제 내가 있는 그대로의 집을 받아들일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