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는 이렇게 말하는 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배수아 작가의 <작별들 순간들>에서 본 문구 때문이었죠.
“나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번역과 작별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했던 마음의 변화가 찾아왔던 것이다.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게 지금이면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이 문구가 저를 휘감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우선 제가 번역이라는 일 자체가 싫어진 건 아님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저는 여전히 번역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10년 넘게 이 일을 하다 보니 그냥 안고 가려고 했던 문제들이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감기 혹은 늘 달고 사는 어깨 통증처럼 제 곁을 서성이는 바람에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랬기에 저 말 앞에서 그렇게 혹 했던 것이겠지요.
어젯밤 잠자리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도대체 뭐가 진짜 문제인지, 제가 앞으로도 번역이라는 것을 꾸준히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인 글을 써보면서 풀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옆에 누운 아이의 고른 숨소리와 가는 코골이 소리가 기이하게 위로가 되는 밤이었습니다.
브런치에 무슨 콘텐츠, 어떠한 콘셉트도 없는 이러한 글을 써보는 게 처음이라 살짝 긴장도 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지금보다는 나은 상태에 도달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봅니다. 저처럼 매너리즘도 번아웃도 아닌 딱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에 처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고요. 이 글이 어디에서 끝이 날지, 그냥 부정적인 하소연으로 끝나버릴지(이것만은 아니기를 바랍니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로 끝날지(이건 더더욱 아니기를 바랍니다) 저도 모릅니다. 다만 제가 이 일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더 잘 안고 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직장에 몸 담고 있었다면 직급과 연봉이 마흔이 넘은 지금의 제 위치를 어느 정도 말해줄 것입니다. 물론 직장을 쭉 다녔다면 또 다른 후회를 하며 살고 있겠지요. 아니 솔직히 제가 직장 생활을 지금까지 견뎠을지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엄연한 사실이 퇴직금 하나 없는 지금의 상태를 덜 불안하게 만드는 건 아닙니다. 최갑수 여행 작가는 <어제보다 나은 사람>에서 노력만 한다고 성공하는 시대는 아주 오래전에 지났다고 말합니다. 노력을 쏟고 있지만 잘 되고 있지 않다면 잠시 멈춰보라고, 분명 내가 들어갈 만한 빈자리가 있을 거라고. 정말 그럴까요. 그동안 쏟은 노력의 방향이 잘못된 걸까요.
내 일을 계속하려면 내 삶과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그의 말 앞에 멈춰봅니다.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면 방황하고 힘들어한다고요. 지금의 제 상태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젯밤 종이책으로 나올 뻔했던 저의 전자책 <그래도 번역가로 살겠다면>의 원고를 읽어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에는 진심에서 쓴 글들이었겠지만 내가 나를 속이며 쓴 것 같은 느낌도 들었거든요. 종이책 계약이 이루어졌으나 출판사 사장님의 사정으로 진행이 되고 있지 않은 그 책의 원고를 보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불과 1년 만에 달라진 상황과 생각 앞에 가슴이 철렁였습니다. 겉멋이 잔뜩 들어간 글 앞에 어디론가 마구 숨고 싶어 졌습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제가 쓴 글들이 전부 거짓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중 본질에서 살짝 벗어난 글들이 보였던 것이지요. 스스로를 다치게 할까 봐 그런 방어막을 살짝 친 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의 이런 생각들 역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일시적인 생각으로 남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 봅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프리 워커로 일할 테고 프리 워커로 일하는 한 내가 언제까지 일할지, 이 일을 왜 하는지, 하루에 얼마나 일을 하며 얼마나 버는지 같은 질문은 죽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힐 테니까요. 저와 비슷한 감정의 온도를 건너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함께 고민해 봐도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