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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고기자리 Apr 16. 2023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제가 번역가가 된 계기부터 거슬러 올라가 볼까 합니다. 초심으로 돌아간다 뭐 이런 거창한 얘기는 아니고요 누구에게나 있는 시작을 짚어가다 보면 이 상태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일 뿐입니다.


저는 건축을 전공했지만 원래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건설회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영어 관련 업무는 저에게 곧잘 떨어졌지요. 그러니까 제가 어느 날 갑자기 영어번역가가 되겠어, 하고 마음먹었다기보다는 업무를 하는 동안 그런 기회를 맛보고 어라 내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지금은 비전문가지만 뭐 방법은 찾으면 되지 않을까, 지긋지긋한 직장생활을 언제까지고 이어가느니 프리랜서로 한번 일해보자,라는 마음이 저를 서서히 물들였던 거죠. 그 무렵 회사에서 감원 바람이 일면서 어제까지 화장실에서 농담을 주고받던 대리님을 과장님을 하루아침에 볼 수 없게 되는 무시무시한 상황도 한몫했겠지만요.


지금도 저는 그때 그 선택만큼 잘한 건 없다고 봅니다. 저라는 사람에게 직장 생활이 얼마나 맞지 않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조직 생활을 못 한 건 아니었습니다. 사실 잘하는 편에 속했죠. 하지만 저는 한 곳에 매여서 저의 하루를 낭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데 회사에서 전표를 치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니까요. 그곳에서 저의 미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은 순간, 드디어 그 높던 연봉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회사를 그만둔 게 2010년. 꼬박 5년을 일하고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그만큼 돈을 벌어본 적도, 당시 신입사원 시절의 절반 밖에 안 되는 수입을 넘어선 적도 없지만 제 선택만큼은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1년 동안 죽어라 공부해서 통번역대학원에 입학한 이후로 지금까지 쭉 번역을 하고 있고 있는 걸 보면, 두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에서도 단 한 번도 일을 놓은 적 없는 걸 보면, 제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는 건 맞는 듯합니다. 이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지쳤다면, 그건 아마도 10년 넘게 했어도 아무리 발악해도 일정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수입 때문일 겁니다.


그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일 텐데,


하나는 워낙 낮은 단가에서 시작했다는 사실과 일이 꾸준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아이들을 돌보며 일하느라 하루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전적으로 적었다는 점, 이겠죠.


몇 년 전부터는 상황이 조금씩 나아져 단가도 살짝 올라가고 아이들도 학교에 가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소득이 확 올라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네요. 직장인처럼 종일 일한다고 가정하고 계산해 보면 나쁘지 않다고, 아이들을 돌보며 이 정도 버는 것도 잘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제 안의 일부는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하나 봅니다.


한편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나는 정말 하루 종일 일하고 싶은 건가. 홍한별 번역가가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 오전 시간만 일한다는 글을 어디에선가 봤는데 그렇게 일해서 어떻게 한 달 생활비를 버나, 저는 굉장히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봤거든요. 그런데 저 역시 여건만 된다면 그 정도만 일하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도 있다는 걸 얼마 전 깨달았어요. 물가 비싼 뉴욕에서 생활비를 마련하려면 지금의 일당으로는 쉽지 않다는 결론 앞에 매번 봉착하고 말지만요.


프리랜서의 특성상 수입은 늘 들쑥날쑥입니다. 업무 의뢰는요? 저 정도 연차면 꾸준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일이 몰리는 걸 감당하지 못해 거절하다 보면(정말 어쩌다 발생하는 일입니다) 언젠가는 아무런 일이 없는 달이 발생하곤 하죠. 다행히 지금은 월 수입의 절반 정도를 확보할 수 있는 꾸준한 일을 받아 한 시름 덜었지만 이 일조차 언제 끝나버릴지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 수입은 저에게 정말 감사한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뭔가 다른 걸 더 해볼 수도 있겠고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몸이 안 따라주잖아요. 조금 무리하면 어깨가 허리가 하소연을 하곤 하죠. 엄마인 제가 몸져누워 있으면 집이 엉망진창이 된다는 걸 알기에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늘 생각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일처리에만(마감이 있는 일) 집중하고 그동안 파던 우물은 잠시 공사를 중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제가 지친 이유가 그런 우물들의 성과가 나오지 않아서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 우물 이야기는 뒤에서 해볼게요.


그리고 사실 저는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이면 자기 홍보나 그런 건 안 해도 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생태계에 몸담고 있는 이상 가만히 멈춰 있으면 그냥 뒤로 밀려버립니다. 나 여기 있다고 끊임없이 손을 흔들어야 해요. 그걸 안 하면서 하소연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되죠. 솔직히 언제까지 이 짓을 해야 해!라고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날도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프리랜서에게 자기 홍보와 일은 한 쌍으로 가는걸요. 더 이상 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이 바닥을 떠날 거라면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자나 깨나 나를 알리고 부지런히 여러 씨앗을 뿌려둬야 합니다.


저는 어쨌거나 이 일이 좋고 이 일로 생활비도 대고 나중에 아이들 대학도 보내야 하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수록 프리 워커가 우세해지는 시대에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는, 제가 갖고 있는 이 역량이 저는 솔직히 좋습니다. 제가 나중에 다른 직업을 택한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저만의 무기니까요. 직장인과는 달리 퇴직금 하나 없다는 게 조금 그렇지만 직장인에게는 없는 작은 명예 같은 건 또 있잖아요. 누구의 간섭도 없이 혼자 일할 수 있고요.


그럼 다음에는 제가 이 일을 꾸준히 하기 위해 뿌린 씨앗이나 파고 있는 우물들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해 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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