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의 도중, 나를 반짝이게 할 모든 것

읽고 쓰는 삶

by 물고기자리
어느 여름의 해 질 무렵, 매물로 나온 숲에서 쓰러진 나무에 걸터앉아 있으니 밑천도 없는데 갑자기 꿈이 부풀었다. 볼을 쓰다듬으며 지나가는 바람이 정처 없는 인생의 불확실성을 알려주었다. 고민하지 마, 마음 가는 대로 나아가!

《긴 여행의 도중》, 호시노 미치오


인생의 방향을 틀려고 할 때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쳤을 계시적인 순간. 지금의 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볼까 고민할 때면 늘 불던 바람 이건만 마치 내게 불확실성을 건네주러 온 것처럼 느껴지고 마는 것.




알래스카 설원에 생을 바친 사진작가, 호시노 미치오는 "분명, 사람은 언제나 각자의 빛을 찾아다니는 긴 여행의 도중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빛을 찾아다니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지구가 이렇게 반짝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누구일까, 내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시간과 풍경 속에 나는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기록하려고 하는가. 내가 요새 자주 묻는 말이다.


토니 모리슨은 "나는 나의 서가를 둘러보고 거기에 없는 글을 쓴다."라고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게 진정 아무도 쓰지 않은 글인가, 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나에게 그러한 재주는 없다. 작가가, 소설가가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상상해 독자에게 제공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그런 작가가 되기는 그른 것 같다.


다만 내 안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 받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은 눈 감는 날까지 계속하고 싶다. 시인이 고른 촘촘한 단어와 문장을 사지 선다로 해석하는 입시 교육 속에 잠시 주춤했던 예술가를 다시 꺼내어 구겨진 주름도 펴주고 햇살 좋은 날 밖에 널어 햇빛도 가득 쬐게 해주고 싶다. 무엇보다도 죄책감 없이 이 모든 것을 하고 싶다.


쓰는 사람은 결코 목표를 향해 돌진하듯 써 내려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쓰고 싶은 대상 앞에서 망설이고, 자주 기다립니다. 매일 겪어온 아침을 처음 겪는 아침인 듯 다시 생각합니다. 당연한 것을 질문합니다. 많은 것이 적은 것이 될 때까지, 긴 것이 짧은 것이 될 때까지 두리번거립니다.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 박연준


삶이 긴 여행이라면,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여행을 한다면 좋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에 대해 자꾸 생각하다가 '현실 같지 않은 현실인데 그게 또 너무 현실이기도 해서'라는 말장난 같은 결론도달했다. 나는 잘 실패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때론 현실과 너무 닮아 있는 소설을, 때론 너무 비현실적인 소설을 읽지만 둘 다 내가 더 잘 실패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둘의 역할은 사실 같다고 할 수 있다.


고요히 혼자 책을 읽고 등장인물들과 만나고 그렇게 나의 생각을 주무르는 시간이 좋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어둠의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고 누군가는 극단적으로 친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나에게는 친구란 조금은 어두운 나의 영혼을 밝히는 촛불 같은 존재이므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만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거나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SNS를, 영화를 잠시 내려놓고 혼자만의 동굴로 기꺼이 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갔다가 나온 나는 당장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지언정, 나만의 새로움을 발견한 즐거움으로 조금은 발그레져 있을 것이다. 남과 다른 방식으로 더 많은 것을 더 깊게 느끼는 삶. 우리의 긴 여행을 반짝이게 만드는 건 그런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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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여행의 끝에 알래스카로 이주한 호시노 미치오는 1996년, 43세의 나이에 불곰의 습격을 받아 툰드라의 식물에 약간의 자양분을 내어 주고 흙으로 돌아간다. 그의 짧은 생애는 어쩌면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삶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불곰의 습격은 아닐지언정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목숨을 호시탐탐 노리는 것들이 널렸으니 말이다.


코로나로 하루에 몇 십명씩 목숨을 잃고 있는 곳에 살고 있는 내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나는 어떠한 하루를 보내야 할 것인가. 그 시간과 풍경 속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


"그렇게 목격하고 온 것에 대해 정작 아무것도 쓰지 못할 수도 있지만 아직 채 밖으로 나오지 않은 어떤 문장들을 담은 채 견딜 수는 있을 것이다."는 김금희 작가의 말처럼 당장은 나의 생각들이, 마음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언젠가는 발화되어 나올 거라 믿으며,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다짐하며 오늘의 풍경을 담아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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