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2020년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마친 날 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만의 영화관 넷플릭스’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학기 중에 본 영화 중에 리뷰를 꼭 쓰고 싶었던 작품이 있었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프랑스 영화 [로렌스 애니웨이]다. 내겐 겨울의 푸른 새벽 이미지로 각인될 것 같은 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형언 못할 어떤 감정에 밀려 뭔가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후기가 완성되지 못했다. 11월에 들어서면서 내 마음에 우연처럼 찾아든 불청객 덕분에 낙엽 같은 처연한 만추의 계절을 유영하느라...
이번에 라이언 머피 감독의 [더 프롬]을 보고 나서도 또 그때와 다른 듯 닮은 감정의 파고를 경험했다. 결이 완전히 다른 영화임에도 뭔가 둘 사이에 분명 교집합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 나를 쓰게 하는가. 생각해보니 [로렌스 하이웨이]는 ‘진정한 나’로 살고자 결심하고 실행하는 용기 있는 남녀의 솔직하고 특별한 멜로가 내 공허한 가슴에 콕 박혔던 것 같다(나중에 본격적으로 써보기로 하고). [더 프롬]은 어떤가. 세상이 맘대로 정해 놓은 규칙과 관습에 맞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싸우는 젊은이들의 청춘 스케치가 한물간 브로드웨이 배우들의 씁쓸하고도 애잔한 서사와 어우러지며 환상적 비주얼의 뮤지컬 영화를 탄생시켰다. 두 영화 다 이 세상의 웃긴 편견 앞에서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며 자아를 찾아간다는 점에서 그 맥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더 프롬] 서사의 한 축은 성소수자로서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두렵지만 그럼에도 소신 있게 자기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청춘들이다. 또 다른 한 축을 책임지는 이들은 브로드웨이에서 그야말로 왕년에 잘 나가던 뮤지컬 배우들이다.
세월 앞엔 장사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원한 스타이고픈 갈망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더 이상 그들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그렇게 초라하게 물러나고 싶지 않은 배우들이 인스타에 올라온 한 레즈비언 소녀를 구하고 자신들의 명성을 되찾고자 헛된 희망을 안고 지방 도시로 떠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그 영웅심리를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헛망이라도 있는 게 어디고. 어쨌든 무망보다야 낫지 않은가.
서사는 아주 단순하다. 갈등에 대한 접근방식에 있어서도 영화는 디테일하게 파고들지 않는다. 오히려 뮤지컬 영화답게 노래의 가사에 실어 보내는 메시지가 가히 선언적이다. 대놓고 교훈을 주는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나로서는 사실 이 영화는 부담스러울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우회할 마음이 전혀 없는 직설화법은 과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사고 회로를 가동시켰다. 그들이 되어본 적 없으니 나와 다른 그들의 고뇌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들 쪽으로 돌아보게 했다. 그들의 얘기가 듣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들어봐야 판단을 해도 할 게 아니던가. 그래서 열심히 메시지 하나하나 집중하며 들었다. 그리고 나는 과연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가를 자문했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감정이입이 됐다는 말을 많이 한다. 마치 주인공이 된 듯 공감하고 같이 울기도 웃기도 하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는 의미다. 그게 영화를 보는 묘미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나는 감정이입보다는 어쩌면 브레히트의 독특한 미학인 ‘낯설게 하기’ 관점에서 이 영화를 감상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감상법이기도 하고. 등장인물과의 감정적 공유, 그로 인한 정서 특유의 정화작용도 물론 중요하고 그것이 영화와 같은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소중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영화들은 주인공에게 완전히 공감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전에도 소개한 적 있지만 소외 효과(alienation effect)’라는 게 있다. ‘이간, 소외’라는 뜻의 영어 단어 ‘alienation’도 이 개념을 나름 잘 설명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낯설게 하기, 생소화’라는 의미의 ‘Verfremdungseffect’, 이 독일어 표현이 더 와 닿는다. ‘낯설게 하기’란 연극 용어로서 ‘현실 속 익숙한 환경을 생소하게 보이게 함으로써 극중 등장인물과 관객과의 감정적 교류를 방지하는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이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하여 충격적인 것으로 제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했다. 즉 설명이 필요하며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보게 하는 기법이라는 것이다. 이 낯설게 하기는 관객이 무대의 사건에 대해 연구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갖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브레히트는 등장인물들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관객들이 역사적 상황 안에서 차가운 이성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그 구조적 모순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현실에서 친숙하게 느끼는 자본주의 배경하의 사회적 환경, 그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더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어떤 의미를 확정하여 그것을 관객에게 전달하고 거기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브레히트를 참 많이 좋아했던 롤랑 바르트가 했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기호를 통해 시대상을 보게 하고 그 시대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관객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지시 효과만을 갖는 게 좋은 작품이라고. 이것이야말로 예술의 위대성인 것이다. 그래서 시대적 담론에 민감한 예술가들의 작품만이 시대상황을 지시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더 프롬]은 사람들이 쉽게 감정 이입할 수 없는 주제를 정면에 내세워 관객들로부터 낯설게 하기 효과를 이끌어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기에 이 영화가 불편한 사람들도 분명 있으리라. 하지만 보기로 결정한 관객이라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당연하게 타인의 누릴 권리를 침해하는 모습 앞에서 ‘과연 저래도 되나?’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제도적 모순 뒤에 숨은 인간의 나약함을 마주하고 어느 순간 ‘그래도 저러면 안 되잖아’ 반성하게 된다. 거기에 그동안 자신과 다른 그들을 바라보며 드러내지 않았던 비겁한 본심을 조금은 편하게 털어버릴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고마운 덤이다.
니체로부터 시작된 ‘선악은 더 이상 이분법적으로 명료하게 경계 지어지지 않는다’는 사유에 힘입어 이제는 영화의 서사 역시도 권선징악이 아닌 중층적으로 읽히는 작품이 늘어나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적인 측면의 그림자를 읽어내고 그것을 등장인물에 투영해서 중층적 의미를 창조해내는 좀 더 복잡한 플롯이 각광받는 시대다. 낯설게 하기의 방식은 바로 그런 작품들 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더 프롬]이라는 영화가 전형적인 낯설게 하기식의 플롯은 아닐지라도 내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해석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플롯이 아닌 영화가 다루는 주제의식 때문이었으리라.
그동안 자본주의가 길러낸 대중과 그들이 가장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미국 소비자본주의의 총아로서의 대중매체 넷플릭스가 자본주의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무거운 주제들을 건드리고 그것들을 대중에게 보여줌으로써 대중 스스로 판단하고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그 존재 이유는 충분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복잡한 인간 세상의 빛과 그림자를 어떤 방식으로든 접하고 그것을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인간의 본능인 쾌락추구 저편에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숙고해야 할 산더미 같은 과제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슈에서도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