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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킴 Nov 13. 2024

8_명경지수明鏡止水

에세이로 풀어보는 고사성어 이야기

명경지수(明鏡止水)는 내게 느낌적 느낌으로 다가온 의미 그 이상의 깊은 가르침을 주는 사자성어다. 그래서 내겐 조금 더 특별하달까.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관련된 고사는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편에 나온다. 오늘은 이 성어를 통해 장자(莊子)가 하고 싶었던 말을 톺아보는 시간을 갖기로!! 일단 그 한자구성을 보면 요렇다.


밝을 명(明), 거울 경(鏡), 그칠지(止), 물 수(水)


‘명경(明鏡)’은 ‘밝은 거울’이다. ‘지수(止水)’는 뭐냐? ‘멈춘 물’이다. 여기서 멈췄다는 의미는 고요하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겠다. ‘고요한 물’로 말이다. 그리하면 ‘밝은 거울과 고요한 물’ 되시겠다. 그래서 그게 뭐? 무슨 의미냐고요.


지금은 우리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할 때는 거울을 보면 된다. 그뿐이랴.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형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널리고 널렸다. 그럼 옛날 사람들은 무엇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까? 귀족들이야 그래도 낫지 싶다. 청동에 반짝반짝 윤을 낸 거울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가난한 백성들은?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바쁜 그들에게 어디 그런 호사스러운 여유가 있었을까마는 그럼에도 꼭 했어야 한다면 그들은 물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보았으리라. 


그럼, 생각해 보라. 거울처럼 뭔가를 비추어보려면 청동거울에 녹이 슬면 되겠는가? 물이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런 상황에서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보아내기란 불가능하리라. 그러니 청동거울은 녹슬지 않게 늘 밝게 닦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물은 고요함을 유지해야 할 것이고. 이런 맥락으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는 한자를 다시 들여다보면 이제 금방 이해될 테다. 


<장자(莊子)>의 ‘덕충부(德充符)’편을 펼치면, 먼저 ‘지수(止水 )’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그것도 공자님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말이다. 장자에 공자님이 나오셨다고라? 그렇다. 장자는 이렇게 자기 글 속에서 공자를 통해 가르침을 전하곤 한다. 자신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공자를 은근히 돌려 까며 자기 철학의 장점을 더 부각한달까? 하하. 그래서 장자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나와서 얘기를 나누는 장면이 많다. 참 흥미로운 부분이다. 


아무튼, 노(魯) 나라에는 형벌로 다리 한쪽을 잃은 왕태(王駘)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았다네. 공자의 제자 수와 맞먹었다고. 어느 날, 상계(常季)가 공자에게 물었단다(상계는 가상의 인물이다). 이 외발이는 서서도 가르치지 않고 앉아서도 설명하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텅 빈 채로 갔다가 가득 차서 돌아온다고. 정말로 말없는 가르침이라는 게 있느냐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아도 마음으로 얻는 것이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공자의 대답은 이랬다. 


“사람은 흐르는 물에는 자신을 비춰보지 않고 멈춰 있는 물에 비추는 법이다. 오직 멈추어 있는 물만이 멈추고자 하는 숱한 사람들을 멈추게 하느니라(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지수(止水)’가 여기서 나왔더라. 근데, 물의 저 고요함을 위해서는 어떠한 사물의 개입도 있어선 안 되겠구나. 돌이 날아와서도 안 되고 바람이 불어와서도 안 되겠네. 와… 이거 정말 쉽지 않겠다. 그렇다. 물이 고요하게 유지되듯 마음의 평정을 가지려고 애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노력이 있은 후에는 분명 ‘고요한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되리라. 


‘명경(明鏡)’이 나온 맥락은 바로 저 고사 뒤에 이어지는 신도가(申徒嘉)와 정자산(鄭子産)의 대화인 듯하다. 신도가(申徒嘉) 역시 형벌로 다리가 잘린 외발이다. 이 둘은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었더라. 아마도 정자산은 같은 문하생이지만 저 외발이 보다는 자신이 한 수 위라는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외발이랑은 같은 공간에 머물기 싫었던 정자산(鄭子産)이 내놓은 ‘지맘대로’ 규칙은 이렇다. ‘내가 여기 머물면 니가 나가고 니가 나가면 내가 머물게. 알았쥐?’ 근데, 자기가 왔는데도 신도가는 꼼짝도 안 하는 거다. 기분이 언짢아진 자산이 말했다. ‘설마 너는 나와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때 신도가가 이런 말을 한다. ‘거울이 밝으면 먼지가 앉지 않고 먼지가 앉으면 밝지 못하다’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자(莊子)는 이 고사에서 최고의 성인을 ‘밝은 거울’이라고 표현했다는 거다. 성인의 마음가짐은 저 밝은 거울과 같이 사물 그대로를 비출 뿐, 그로 인한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는 거다. 그 말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본연의 모습을 받아들임을 의미할 게다. 자신의 외다리인 모습도 그대로 수용하고 그로 인해 그 어떤 감정의 꺼림도 없다는 거다. 밝은 거울에 먼지가 앉는 법이 없듯이 말이다. 즉 내적으로 타고난 덕을 품은 자는 성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사람은 희로애락의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이 정지해 있을 때와 같이 고요하게 평정심을 유지하고, 먼지가 앉지 않는 밝은 거울처럼 감정의 찌꺼기 없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덕(德)이다. 장자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다. 외적으로 불구인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그 보여지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말하고자 했던 거다. 


이렇게 ‘덕충부(德充符)’편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결국 타고난 덕을 온전히 간직할 줄 아는 사람은 그것을 겉으로 일부러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는 일부러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않은 주인공들을 통해 온전한 덕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외적인 것보다 내적인 것’이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왕태도, 신도가도 외다리인 자신의 처지를 어떤 변명도 불만도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니 모두가 그들을 성인으로 추앙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들에겐 외적인 결핍이 결코 내적인 덕에 영향을 주지 않았음이라. 


명경지수에 대한 사전적 정의인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 너머의 이토록 깊은 의미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긴다. 오늘을 사는 동안, 한 순간만이라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면서 내 안의 덕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봐야지 다짐한다. 혹시 내게도 타고난 덕이 먼지만큼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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