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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킴 Aug 23. 2020

영화 [스틸 라이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달팽이집 속에 숨어 살던 때가 있었다. 그 깜깜하고 좁은 공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희미하게나마 어둠을 밝혀주던 영화보기였다. 하루가 언제 나한테 오고 또 그 하루가 어떻게 내 곁을 떠나가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세상과는 동떨어진 고립된 삶 가운데서 나를 숨 쉬게 한 건 영화 속 판타지였다. 


스크린 속 주인공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며 그들이 나인 양 내가 그곳의 일부인 양 그렇게 완벽하게 몰아(沒我)의 세계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미친 듯이 뭔가를 찾고자 했다. 


내가 가장 슬플 때 나한테 와서 나를 가장 많이 울게 했던 영화, 그리고 그 극한의 슬픔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나를 위로했던 영화, 바로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의 [스틸 라이프]다. 



지극히 평범한 한 남자의 특별할 것 없지만 눈물겹게 성실한 일상이 내게 던진 메시지는 아주 강렬했다.


존 메이는 런던 케닝턴 구청의 22년 차 공무원이다. 그가 하는 일이란 홀로 죽음을 맞이한 무연고자들의 지인을 찾아 장례식에 초대하고 그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 해주는 것이다. 그의 일상은 매일 똑같다. 늘 같은 옷에 같은 식사를 하고 늘 같은 길을 걸어 출근을 한다. 


주검이 되어서야 그를 찾아온 의뢰인들,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의 유품을 정리하는 그의 선한 진심이 내 고요하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켰다. 죽음의 현장에서 발견된 그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도 고인을 위한 추도문을 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혹여라도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증명할 만한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띄면 낡고 온전치 못한 피 묻은 사진일망정 정성껏 닦아 사진첩에 넣어 보관했다.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보잘것없는 흔적일지라도.


그렇게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 그의 이웃에 살던 ‘빌리’라는 남자가 사체로 발견된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존은 회사로부터 정리해고 통보를 받는다. 이런 얄궂은 인연이라니... 마지막 의뢰인이 된 ‘빌리’의 장례까지는 책임지고 싶은 존은 빌리의 유일한 가족인 딸이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하고 싶어서 그 딸을 찾아 무작정 길을 나선다. 알코올 중독에 노숙자로 살기도 했지만 빌리는 그 누구보다 버라이어티한 삶을 살다 간 남자였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통해 존의 단조롭던 일상이 조금씩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의 생애 처음 가슴 설렜을 그 순간에 찾아온 예기치 못한 사고...



아... 존이 사고를 당하던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안 된다고. 이렇게 착한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서는 안 된다고. 그를 이대로 보내면 하나님을 원망할 거라고. 내 안의 저 깊은 곳으로부터 차오르는 절규를 부여잡고 나도 같이 울었다.


감독이 나의 절규를 들었나 보다. 착한 존 메이를 죽게 한 감독에 대한 원망을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완전히 거두었다. 여기선 말하지 않으련다. 그 장례식 장면만큼은 꼭 직접 봐야 하기에. 그 순간의 전율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하리라. 




영화는 시종일관 주인공 존 메이의 동선을 따라 잔잔하게 흘러간다. 대화도 많지 않고 그저 존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낼 뿐이다. 고인의 빛바랜 사진을 사진첩에 끼워 넣고 그를 위한 기록을 남기는 존의 모습, 아무도 찾지 않은 장례식장 맨 뒤에서 홀로 추모하는 장면은 가슴 한 켠을 아리게 한다. 그렇게 감독은 러닝타임 내내 아주 담백한 톤만으로도 관객을 울컥하게 만든다. 


묵묵하게 자신의 소임을 다하며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준 존 메이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그의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감독의 연출은 최고의 명장면이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애도는 결코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결국 애도는 죽은 자를 기억하는 것으로 나타나서 우리의 삶과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는 것이다. 


애도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데리다 역시 죽은 자의 부재를 슬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타자성의 흔적을 내 삶 속에 받아들이고 남겨진 자로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윤리라고 했다. 죽음을 단지 수동적 슬픔으로 해석하지 않고 우정과 사랑과 환대의 성격으로 재해석하여 우리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한 것이다. 


나는 그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한참을 울먹거렸고, 그리고는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존 메이의 죽음을 애도했었다. 오롯이 그를 위한 애도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문득 그가 내 삶 속에 이미 들어와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멋지게 하지만 가슴 아프게 혼자일 수밖에 없는 우리, 서로 타인이 되지 말자는 감독의 메타포가 내 안에서 실현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삶은 계속되어야 하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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