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공간이지만 심리상담실이라는 푯말을 보자마자 느끼는 감정은
편안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함께 들여다보는 과정이 늘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으니까.
앉아서 상담사분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기까지 약간의 긴장감도 든다.
갑옷을 다 벗고 속살이 훤히 들어난 채로 구부정하게 앉아있는 랍스터 같은 내 모습을 생각한다.
이번엔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물어본다. 나는 어릴 때 어떤 아이 였었냐고.
파노라마처럼 어릴 적 모습들이 줄줄 생각나지만, 그 중 어떤 것을 얘기해야할지 고심해본다.
가끔씩은 문제적이지 않은 것들도 문제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생각도 하며.
나는 오래된 것에 애정도와 이해도, 내성과 관용도가 높아진다. 오래 살아있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겠지만 어릴 적부터 할머니가 너무 좋았고,
꽤 오랜 시간 엄마보다 할머니가 날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동네 목욕탕을 가도 혼자 오신 할머니들의 등도 여쭤본 이후에 그렇게 밀어 드렸던 것 같다.
내가 본성이 그저 선해서였을까. 착한 아이로 사랑받고 싶은 욕구였을까.
주름 진 따뜻한 눈빛과 거칠지만 따뜻하고 강단있는 손을 잡는 게 좋았고,
내 있는 그대로 부족해도 똥강아지처럼 포용해줄 것 같은 그 모습에 어린 내 마음이 활짝 열렸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고, 회사를 다니며 늘 잘해야한다는 무언의 압박속에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수능을 평소보다 잘 못치고 방에 드러 누워 있는 나를 한심하듯 바라보는 엄마의 눈빛에서 경멸감을 읽었다.
수능을 안치고 난리를 쳐도 조건 없이 사랑해주길 바랬던 내 마음이 어렸던 걸까.
점점 나이가 들고 그때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눈빛이 내가 기억하는 만큼 차갑지는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과거의 그 시점에서는 아마도 내가 나를 경멸의 눈으로, 한심하게 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결혼까지 생각했던 지나간 연인을 사랑한 방식도 똑같았다.
어릴 적 발표를 할 때에도 좋은 글을 써서 발표를 했다는 것보다는,
그 글을 조금은 더 정갈하게 쓰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했던 엄마의 사랑의 방식을 지독히도 싫어하고
나는 절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할 때 나도 똑 같은 방식으로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것만 조금 더 하면 좋을 텐데. 이렇지만 않으면 더 좋을텐데. 라며 있는 그대로 그를 수용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틀에 그가 구겨 맞춰지기를 바랬다.
내가 바라는 건 크지 않으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비슷했다.
나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나에게 꽤 높은, 다시 말해 인생 전반적으로 늘 절대 그렇게 될 수 없는,
기준을 세워두고 그것에 내가 맞지 않을 때면 나를 호되게 자책했다.
심리 상담사가 얘기한다.
'자기를 완벽하고 너무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지혜씨에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게.
애초에 불가능한 기준을 나와 동일시해서 그렇게 몇십 년간 나를 들들 볶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미안함에 울컥 눈물이 나온다.
늘 그렇듯 탁자 밑에서 각티슈가 올라온다.
자연스럽게 티슈를 받아들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을 닦아낸다.
왜 상담실에서 흘리는 눈물은 유난히 온도가 높게 느껴질까. 그저 내 느낌일까.
오랜 시간 동안,
사회에서 정해 놓은 시험을 잘 치지 못해서 내 존재가치도 무용하게 느껴지는 그 경험이 나를 따라왔다.
나를 낳아준 엄마의 눈에서 읽은 그 감정이 성인이 되어 밥벌이를 하고 잘 지내고 있는 나를
한번씩 흔들어 놓는다.
잘 못하는 나. 쓸모 없는 나. 무능력한 나. 부족한 나. 병신 같은 나. 등신 같은 나. 헛똑똑이인 나.
많은 동일화로 나는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의 불완전함을 혐오하지 않는 연습을 한다.
잘 못했을 때 그저 따스한 눈으로 바라봐주고,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도 공장에서 찍어낸 기성품이 아니니 무용해도 괜찮다고 위로한다.
내가 어릴 적 그렇게 갈망했던 따뜻한 할머니의 눈으로 나를 그저 토닥토닥 위로해주고 안아준다.
그렇게 나를 보니 점점 타인에게도 관대해지는 걸 느낀다.
그들도 또 그들 나름대로 특성이 있는 거니까.
또다른 나 같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거나 다른 상처를 가지고 더 아파하지 않기 위해서 꾹꾹 참거나
엉엉 울면서 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자신은 없기에 또 알람이 울리면 하루하루 살아내는 일상.
내가 가장 무가치하다고 느꼈던 그때를 돌아보며,
문득 나의 가치는 무엇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자문하게 된다.
나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기준에, 아니면 많은 타인이 모인 사회의 기준에 맞춰서 감히 평가할 수 있을까.
똑같이 말하면 내가 타인을, 그리고 많은 타인이 모인 어떤 사회를 평가할 수 있을까. 내가 뭐라고.
그리고 네가 뭐라고. 결국 우리가 뭐라고.
이 삶은 상대적인 공간이다. 내가 가치 있음을 느끼는 만큼, 무가치함을 느낄 수 있는 곳.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그리고 내 주위의 누군가가 암흑 같은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그때 내 어두운 방과 차가운 눈빛을 생각한다. 춥고, 아프고, 사무치게 외롭다.
내가 계속해서 소환하고 있는 기억이지만 그래도 그 순간은 지나갔다.
나는 15년이 지난 지금 누가 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물론 기분이 나쁘지만,
타격이 그때만큼 크지는 못하다. 네가 뭔데. 나를 평가해. 라는 좆까 마인드로 오늘 하루를 또 살아낸다.
15년 뒤엔 그때의 그 기억이 어떤 느낌으로 나에게 남아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