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가장 태초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by 류류류

나는 가까워지는 사람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가장 태초의 떠오르는 기억은 무엇인지.

나와 타인의 태초의 기억을 알게 되면서,

어렴풋이 생각하게 된 게 그것이 우리가 이번 생에서 소화시켜야 할 중요한 감정을 보여준다는 것 같다는 것.


내 태초의 기억은 4살 즈음인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 하늘에서 바라보는 내 모습이다.

친구 집에서 놀다가 옷이 젖었는지, 거기에서 친구와 같이 씻고, 친구의 어머니가 나를 집에 보냈는데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친구는 남자아이였던 것 같다.

아들 엄마인 그분은, 기껏 해봤자 걸어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라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수건 하나를 주며 집으로 뛰어가라고 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발가벗은 채로, 차가 2대 정도 지나갈 수 있지만, 주차된 차들로 가득한 그 골목에서,

큰 수건이 아닌 얼굴 닦을 정도의 수건으로 작은 내 몸을 가리고 부끄러워하며 집으로 달려가던 기억이.

사실 그 전후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고,

다만 내가 제삼자의 시선에서, 4살 즈음의 어린 여자아이가,

아담과 이브와 같은 수치심을 느끼며, 아무도 이 골목으로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집으로 뛰어가고 있는 그 순간만이 2D 이미지로 남아있다.


상담사는 말했다. 그건 어른이 잘못한 거라고.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어른이 잘못했다.라고 하면 내 마음이 좀 괜찮아져야 하는 건가. 하고.


이 기억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게 기억되고 있는, 그저 나의 태초의 기억이었다.


그 이후에 기억하는 내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기억들에도

수치심을 느꼈던 기억들이 유독 다른 것 보다 많은 것은, 아마 이 감정이 다른 감정들 (좋든 나쁘든)보다 나에게 훨씬 강력하게 각인되어 있어서일까.


마지막으로 만났던 전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그의 태초의 기억은 무엇이냐고.


어릴 적 병원에 있었을 때, 같은 병실을 쓰던 작은 아이가 거기서 죽었다고 했다.

그때 그 아이의 모습이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태초의 기억이라고 했다.

생존과 죽음.


우리가 마지막에 헤어진 이유는, 그가 스스로 자립하는 것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에서 살아가는 게 꽤 어려웠던 이유였다.

나는 그의 옆에서 자리를 지킬 만큼 그를 사랑하진 않았다.


우리 아빠의 태초의 기억은 아니지만, 태어나자마자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7남매, 아들 6명과 딸 1명 중 밑에서 두 번째, 막내 바로 위였던 우리 아빠는

태어난 직후 숨을 쉬지 않았다고 했다.

1962년이었고, 남해 섬에서 태어난 그의 몸 위로 천이 올라갔다.

그땐 그랬다고 했다. 병원도 아니고 집에서 아기를 낳았을 때니까.


천 아래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다시 보니,

우리 아빠가, 당연하게도 숨을 쉬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이 태초의 기억을 전달받는다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 보았다.

섭섭했을까. 슬펐을까. 아님, 아무렇지도 않았을까.


갑자기 궁금하다.

내가 사랑하는 많은 이들의 태초의 기억은 무엇일까.


차분하게 새해를 맞이했다.

엄마와 동생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아빠가 제야의 종을 치기 10분 전 즈음에 전화가 왔다.

영상통화를 하자고 하시며, 서로 건강하고 행복한 일 많길 기원했다.


태초의 기억.

올해 최초의 기억.


기억이란 뭘까.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그냥 무작위의 기억들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오늘은 추워서 집에 있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고 나면,

내가 기억할 수 있는 2026년 1월 1일은

지금 이 글로만 남아있겠지.


오늘 내가 먹었던 버터간장스파게티, 떡만둣국, 달콤한 초코칩쿠키 등은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을 것 같아,

여기 괜히 적어본다.


오늘 새해를 맞이해서 정리한 책꽂이.

마알끔하게 정리한 싱크대.

내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준비한 종이가방에 여러 물건들.

목감기가 와 침 삼킬 때마다 목이 따끔거리지만, 이 정도 감기인 것에 감사하는 마음.

조용한 새해 첫날.


가만히 물어본다.


'당신의 가장 태초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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