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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K Mar 31. 2017

내가 만난 남자 - 소개팅남 2

늦어서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안경을 썼구나. 사진엔 안경 안 썼던데. 쓰니까 더 멋있다.

키가 작네. 피부가 진짜 좋구나. 사진보다 훨씬 괜찮다.

늦었지만, 하나도 불쾌하지 않아. 뭐, 많이 늦은 것도 아니니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오시느라 힘드셨죠.


최대한 상냥하고 밝아 보이게.

치마를 입어서 그런 걸까, 괜히 조신하게 말하게 되네. 분명 이건 치마 때문이야.

이 모습을 내 친구들이 보면 얼마나 놀릴까. 괜찮아, 나 왠지 잘될 것 같아.


첫인상은 말할 것도 없이 좋았다. 어쩌면 긴 솔로 생활을 청산할 수 있지 않을까. 

메뉴를 주문하고 서로에게 궁금한 점을 이것저것 물어보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나의 소개팅남은 순진해 보이는 외모와는 다르게 외국에서 오래 살아 

한국 음식보다는 양식이 더 입에 맞는다고 했다.

나의 소개팅남은 바지보다는 치마나 원피스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했다. 

나의 소개팅남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기가 센 여자보다는 

자신을 지지해주는 현모양처 스타일을 더 선호한다고 했다. 

나의 소개팅남은 마지막으로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는 여자라면 더할 나위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외국 생활에서 가장 힘든 점이 김치와 된장찌개, 떡볶이를 자주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치마를 내 돈 주고 사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나서서 발표하고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을 즐겨하는 기가 센 여자라고 항상 들어왔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야근과 외근을 밥 먹듯이 하는, 

어쩌면 아이를 낳는 것과 커리어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는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나의 소개팅남은 분명 나에게 호감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취향을 말했을 것이다. 

내가 그런 여자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샤워 후에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기도 귀찮아하는 내가 탱글탱글한 웨이브 스타일을 하고,

한 달에 한 번도 입을까 말까 한 여성스러운 치마를 입고,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그저 조신한 리액션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실은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어느 정도는 그의 취향을 알고 있었고, 

난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나 자신과 그를 속이고 있었으니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나의 소개팅남은 좋은 사람이었고, 나는 점점 나쁜 사람이 되어갔다.


돌아오는 길은 씁쓸하고 허무했다. 

대화는 즐거운 분위기에서 끝이 났지만 진정으로 즐거웠다고는 볼 수 없었다. 

나는 타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가면을 쓰고

당신이 좋아할 만한 사람이 바로 나인 척, 그를 속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까. 

내숭이 아예 없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지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난 이런 사람이 아닌데.

치마는 왜 이렇게 불편한 거야, 다시는 안 입고 싶다.


사랑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랑해주는 사람과 하고 싶다.

나 또한 상대의 솔직한 모습을 바라보고 사랑에 빠지고 싶다.

비록 나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자신을 꾸며야만 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사랑만큼은 나로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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