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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지나 Feb 15. 2019

책 한권의 시간

여유의 무게를 달아보는 방법

2018년 한 해를 브런치를 여러 번 열었다 닫는 것으로 그냥 보내 버렸다. 브런치에서만 나를 맞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무척 게으르고, 자기 소식을 공유하기를 꺼려하는 비밀스러운 사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그런 신비로운 존재감을 갖는다는 것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요즘 세상은 서로 연결된 여러 개의 SNS로 생존 신고를 너무 자주하는 세상이니, 나는 아마 누구에게도 미스터리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유튜브에서 인스타그램을, 인스타그램에서 트위터를, 트위터에서 브런치를 홍보하며 저 여기에도, 저기에도 있어요, 하고 있으니. 

간단하게 다시 말해 2018년 나는 브런치에게는 미안하지만 다른 온라인, 오프라인의 여러 공간들 속에서만 매우 치열하게 살았다. 


브런치는 나에게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찾는 곳이라 그랬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릴 수 있는 하루가 주어져도 나는 마음이 초조하고 바빠 돈을 받지 않고 쓰는 글 한 줄을 공유하지 못하고 혼자 노트에만 끄적였다. 여행작가, 작사가, 잡지와 웹진과 칼럼 기고가로 활동하며 단어당, 페이지당 고료를 받고 열심히도 썼지만 그냥 쏟아져 나오는 많은 말들은 정리하지 못하고 여기 한 줄, 저기 한 줄 적어 두고 잊었다가 다시 또 생각나 꺼내 보았다가를 반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아무 대가없이 쓰는 글이 더 마음에 들 때가 많다. 주문자의 입맛에 맞추느라, 혹은 (이 경우가 더 많다) 맞추고 싶지 않아서 방어하고 보호해야 하는 낱말들을 수 천 수 만개를 뱉어 내고 지우고 하던 지난 해였다.  


지난 12월 스위스-베를린 여행을 5주간 다녀왔다. 가이드북 취재를 위한 스위스 일정 후 베를린에서는 개인적으로 휴가를 보냈다. 시의성이 강한 정보를 전달하는 여행 가이드북 작업에는 훨씬 더 많은 수정과 문장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에세이와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다. 새벽까지 노트북 앞에 머무는 날이 한두달 지나야 PDF로 첫 레이아웃이 잡혀 만들어지는데, 이 단행본을 만들기 위해 떠난 아주 바쁜 일정이었지만 나는 1년 내내 갖지 못했던 여유를 스위스에서 발견했다. 

브베, 루가노 (c)Gina Maeng


‘나 요즘 여유로워’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로 삼는 것은 ‘앉은 자리에서 책을 한 권 읽을 수 있음’이다. 몇 페이지 읽고 접어 놓고, 다시 그 무드에 빠져 읽기를 하기 위해 몇 장 앞으로 넘겨 다시 읽기를 반복하는 요즘은 책 한 권 온전히 끝내기가 너무나 힘들다. 어렸을 때는 하루 종일 읽고 또 읽어 300페이지가 넘는 책들을 하루에 다섯 권도 더 읽었는데. 도서관 대출 제한 개수가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읽고 어깨에 가방 끈 자욱이 깊게 남을 정도로 무거운 책들을 가방이 미어터져라 넣고 낑낑대며 집에 오곤 했는데, 그게 벌써 몇 년 전인지. 하루는 너무 짧고 읽고 싶은 책들은 너무 많았던 날들이 그립다. 


스위스에서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책을 한 권씩 읽고, 나머지 날들은 장편 소설을 몇 챕터씩 나누어 읽었다. 그렇게 나누어 읽었던 날들도 한국에서 일상을 보내면서 열 쪽 남짓 겨우 읽는 날들에 비하면 넘치게 여유로웠다. 


기차 안에서도 읽고 또 읽고. (c)Gina Maeng


여행을 떠나와 첫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느끼는 그 기분이 정말이지 반가웠다.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커피 한 잔을 한 손에 들고 책을 다 읽으면 무얼 할지, 책을 중간에 덮고 꼭 해야 되는 일이 있는지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커피를 제외하고, 둘 다 무척 힘든 일이었다. 5분에 한 번씩 메시지가 오지 않았는지, 메일이 오지 않았는지, 지금 몇 시인지 자꾸만 확인하다가 책에 완전히 몰입하고 나서야 핸드폰 생각이 나지 않았다. 15분, 30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서 매일을 사는데 일정을 잊고 독서를 하는 것은 처음엔 괴롭기까지 했다. 그래도 스위스 공기가 맑아서, 치즈도 빵도 맛있어서, 머물렀던 호텔이 아늑하고 아름다워서, 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줘서, 알프스는 변함없이 위엄있고 웅장해서, 12월 여행중이던 나는 오롯이 책 한권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눈 감고 짐을 쌀 수 있을 정도로 여행을 업으로 삼은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여행 중 여유를 발견하고 마음에 오래 담는 것이 이제 그리 어렵지 않다. 이상하게도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낸 한국에서는 그렇지가 않다. 귀국행 비행기 안에서부터 나는 엑셀을 켜고 가능할까 싶은 수준의 스케줄을 계획하니까. 4월로 예정된 다음 여행 전까지 나는 아마 앉은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마칠 하루를 찾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여행 가방 속에는 여러 권의 책들을 챙겨 넣을 거다. 우선은 이렇게 산과 바다를 넘어 멀리 떠나서 여유로운 날들을 만나야지. 

생모리츠에서. (c)Gina Mae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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