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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맹지나 Nov 19. 2015

Liberté, Egalité, Fraternité

파리에서 매 순간 경험하는 자유, 평등과 박애

타지에 나가 있으면 그 나라 사람도 아니고 여행자도 아닌, 이도 저도 아닌 괴로운 이방인이 되니 떠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실제로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지 않아 본 사람들이 오히려 더 그런 말들을 하기도 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경험담들을 어딘가에서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일러주기도 하고, 단순히 내가 멀리 떠나는 것이 싫어 가까이 두고 싶은 마음에서 하는 말일 때도 있다. 또 본인이 떠나지 못하는,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한 합리화로 느껴질 때도 있다. 난 여기 있겠다. 떠난다는 것은 너무 많은 준비와 위험 부담을 수반하기 때문에, 하며. 그 많은 준비와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떠나온 것을 긍정적으로 확인 받는 매일을 살고 있는데, 요 며칠의 파리는 테러와 그 여파에도 불구하고 이런 마음을 더더욱 극대화 시킨다. 


잠깐 다른 이야기. 

어떤 논리를 펼 때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는 일반화다. 

본인의 경험에 한정하여 ‘모두 그럴 것이다’라고 정해 놓고 말을 꺼내는 사람에겐 그 어떤 논리를 갖다 대도 소용이 없고 결국엔 목소리 큰 사람이 마지막 말을 하게 되니까. 그렇다고 또 매번 ‘안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지만’ 을 붙여가며 이야기 하는 것도 별로다. 그래서 아주 친한 사이가 아니면 논란이 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아예 내 생각을 이야기 하려 하지 않는다. 일반화된 억지주장을 들어 주는 것도 싫고, 거기에 반박하느라 엄청난 피로를 경험하는 것도 싫다. 


하지만 ‘떠나면 더 고생이다’ 라는 말에, 오늘은 토를 달고 싶다. 

(c) Gina Maeng 

+ Place de la Republique

샤를리 앱도 때도 이 곳으로 모였던 파리 시민들은 테러 다음날부터 약속된것처럼 꽃과 초, 편지와 사진, 그림을 들고 이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파리에서 며칠 전 발생한 테러를 겪고 나서, 이곳에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나에게 파리에서 어느 동네가 가장 좋으냐 물어오면 요즘 힙하고 트렌디한 스팟들이 매일 같이 생겨나는 생마르탱 운하 부근이라 말하는데, 테러는 바로 이동네 – 10구 – 에서 발생했다. 총격은 내가 자주 가는 식당에서 일어났고, 다행히 일 때문에 다른 도시에 내려와 있어 당일 현장을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CNN, BBC, 그리고 프랑스 텔레비전의 모든 채널을 통해 내가 매일 같이 걸어 다니던 거리가 아비규환이 된 모습을 충격 속에서 바라 봐야 했다. 종종 어떤 공연이있는지 찾아보던 인기 공연장인 바타클랑에서 백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같은 날 한국에서는 민중총궐기가 있었다. 



차벽도, 기름과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도, 조준하여 쏜 공격도 모두 합법적이도, 옳지도 않았지만 당하는 시민들의 입장은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았다. 눈과 귀는 현재 나의 집인 파리에서 일어난 사건에 집중되어 있었지만마음은 광화문 광장에 있었다. 매번 지는 싸움을 하면서도 물대포를 맞으러 나가고 또 나가는 사람들은 내 마음을 무척 아프게 했다. 이들을 비웃고 조롱하고 또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예말하고 싶지도 않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일방적인 소모전을 셀 수 없이 겪었기에. 그런데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을 바꾼 사람들에게 왜 우리나라 일에는 신경도 안 쓰고 남의 나라 일에만 열을 올리냐 성토하는 사람도 많았다. 왜 베이루트는 아니고 파리는 이렇게 큰 관심을 받는지 기분이 나쁘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 많은 곳에 관심이 기해져야 하는 것은 분명 맞다. 베이루트에 대한 기사들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리 테러에 반응을 했을 뿐. 더 익숙한 이름이어서, 더 우리 생활에 가까운 장소로 느껴져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다면 9/11때는 왜 이런 말이 없었나? 왜 파리가 온 세상의 추모를 받는 것만 싫은 걸까? 그럼 이제부터 억지로라도 파리 테러에 대한 추모를 멈추어야 하나? 한 번에 한 곳만 생각해야하나? 


(c) Gina Maeng 

+ Place de la Republique

나는 항상 한국을 생각하고 있다. 내가 매일 기사를 접하고 공부를 하고 울분을 토하는 세상의 여러 부조리함에 대한 울분을 온라인에 모두 표시한다면 나의 SNS는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적의와 분노로 가득 찰 것이다. 내가 행복한 모든 순간들을 포스팅 하지 않듯, 애도와 울분 또한 모두 드러내지 않는다. 특히나 그것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 – 한국 – 의 불특정 다수의 공간에서는 더욱 그렇다. 특정 사건에 대한 내 생각을 표시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세계 현안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것이 아님을 설명해야 할 줄이야. 온라인 상이지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그 목소리들이 귀를 따갑게 울리는듯 하여 피로했다. 내 사진을 덮었던 삼색을 걷어 냈다. 그게 그렇게 꼴보기 싫다면 사진을 바꿔 주면 된다. 어렵지 않으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단결이 참 어렵다. 

같은 입장인데 이 입장을 표현하는 방식은 내 방식만이 옳다는 사람들이 참 많다.같은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모두 각각 유일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지치고 무기력해진 상태에서 접하는 프랑스의 연대는 부럽고 또 부럽다. 


(c) Gina Maeng

+좌/중앙 파리에서 볼 수 있었던 연대와 사랑의 표식

+우

테러 다음 날, 생트로페에 있었어요. 

오전 열시에 시장의 추모와 격려의 말이 있었고 1분간 묵념을 하였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도, 지팡이를 짚고 불편한 걸음으로 나온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었습니다. 


당연한 것을 이해시키지 않아도 됨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대통령의 연설을 함께 기다려 경청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토론이 활발히 일어난다. 엄청난 관심은 당연히 존재하고, 그 속의 다양한 관점들이 차이를 보이지만 ‘해결을 해야 한다’라는 전제는 굳건하다. 무엇이 문제이고 해결이 필요하다, 라는 부분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너무나 부럽다.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Vive la France, 라고 말한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이겨낼 것이라 말한다. 결의에 차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여, 약속된 진리를 말하듯 읊조린다. 그것이 인생이다. 우리는 계속 살아 간다. C’est la vie. On avancé. 너무나 부럽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끝까지 듣고 나서야 반박하며, 이러한 토론을 할수 있음을 감사해하고 또 이것을 프랑스 국민으로써의 권리이자 의무로 여긴다. 엄청난 일을 겪은 프랑스인들에게 애도의 마음이 앞서지만 동시에 엄청난 부러움이 그 뒤를 따른다. 나는 이들이 말하는 ‘우리’에 속하지 않지만, 파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괜찮느냐는 안부 전화와 이메일을 엄청나게 받았다. 안전을 걱정해 주는 프랑스인들과 프랑스의 미래를 함께 논했고, 이들의 단결을 응원하고 지지하며 그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국의 상황에 마음이 쓰이고 있지만 우선 눈 앞에 보이는,내가 물리적으로 속해 있는, 사람들이 떠나서 다시 돌아오라 말하는 그 ‘타지’라는 세상에서 감히 행복하다 말한다. 비행기로는 열한시간 떨어져 있지만 민주주의적 가치에 있어서는 수 세기 앞선 미래에 살고 있는 것만 같다. 언젠가 과거로 돌아가야 하겠지만 그 날을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고 감사한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상식적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와 한 나라의 국민으로 느끼는 유대가 존재해도 헤쳐 나가야 할 문제가 많다. 나는 현재 최소한 그 보편적인 가치와 유대가 존재하는 곳에서 살고 있다. 위험은 존재하나 두렵지 않으며, 희망과 미래가 보이는 도시에 살고 있다. 


Paris, je t’aime. 


(c) Gina Maeng

+ 테러 전 날 찍었던 야경입니다.

허니문으로 파리 여행을 왔던 친한 동생 부부와 센느를 거닐며 얼마나 에펠이 예쁜지 수 없이 감탄했던 밤이었어요.  



테러가 있은 후 에펠탑의 불이 백이십여년 만에 처음으로 꺼졌다고 했다. 

처연하나 여전히 아름다웠다. 

요즘의 밤은 에펠을 대신하여 수 많은 초가 밝혀주고 있다. 

굳은 얼굴이지만 눈이 마주치면 희미하게 웃어주는 파리지앵, 파리지엔느들이 하나 하나 길가에 가져다 놓았다.  


Paris, je t’aime. 




노파심에 몇 자 덧붙이자면

이번 포스팅은 사대주의에서 발발한 것도 아니며  

한국이 앞으로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도 깔려있지 않습니다. 

그저 요 며칠 간 파리에서 보고 겪고 느낀 바를 적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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