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속도보다 더 좋은, 일시정지
어딘가를 향해 열심히 걷다 보면 가속도가 붙는다.
목적지를 알고 길을 알면 걸음이 느릴 일이 없지.
(사실 원체 걸음이 빨라, 잘 모르는 곳을 다닐 때도 사실 성큼성큼 직진, 직진이다.)
걸음이 제아무리 느려도, 누구나 ‘우리 동네’ 에서는 속도를 내서 걸을 수 있다.
‘두 블록을 더 가서 왼쪽으로 꺾어야 해’ 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편의점, 하면 자동적으로 발이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모른다.
여행을 다닐 때도, 한번 가보아 이미 길을 아는 곳을 찾아 갈 때는 그렇다.
거의 매일 가는 마레 지구를 다닐 때는 눈을 감아도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가장 좋아하는 서점인 셰익스피어앤 컴퍼니는 파리 시내 가로등이 전부 꺼져도 더듬어 찾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걷노라면 놓치는 것이 많다.
별 것 아닌 사실인데도 인정하기까지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저 갈 길이 바빴던 몇 년 전의 나는 서두르면 놓치는 것이 많다는 말에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을 향해 가고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 달리는데 그 과정에서 놓치는 것은 없다고, 천천히 걸어가면 시간만 낭비할 뿐, 사소한것을 보지 못하더라도 더 크고 좋은 것을 향해 가니 작은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프랑스 남동부의 도시 툴루즈에는 일본식 정원이 있다.
Le Jardin Japonais de Toulouse
(c) Gina Maeng
시내 북쪽, 다른 랜드마크와는 동떨어져 있어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겨울날 아침 일찍 가면 거의 혼자 정원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큰 공원에 들어서 좀 더 걸어 맨 안쪽으로 가야 나타난다. 가면서 구경할 것이 하나도 없어 몇 번이나 시내로 돌아갈까 고민하게 만드는, 가까워질수록 기대가 크게 사그라들지만 도착하면 한꺼번에 모든 걸음을 보상받는, 그런 곳이다.
마음에 드는 여행지에 도착하면 언제나 그렇듯 가쁜 숨소리와 카메라 셔터 소리로 주변 공기를 울린다. 높은 신발을 신고 꽤 걸어, 다리를 좀 쉬게 하려 사진을 찍고 지나쳤던 대나무 숲 앞 벤치로 뒷걸음쳐 앉았는데 불과 10분 전만해도 병풍처럼 정적이었던 대나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대나무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 손짓을 하는 것 마냥 산들거리고, 촤르르르 이파리가 부대끼는 소리도 난다. 바람은 거의 불지 않았지만 대나무 잎사귀가 서로 간질이는 소리만으로도 열이 한결 식는 것 같았다.
피곤하지 않아도 이렇게 가끔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겠다.
일부러 어딘가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들려 오는 소리는 듣고.
일부러 무언가를 찾으려 눈에 힘을 주지도 않고, 앞에 있는 것은 보고.
그런 순간을 좀 더 자주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