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이번 학기가 우리의 마지막 요리 수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 왔다. 주위에 계신 분들은 ‘언제까지 아이들에게 매달릴 거야. 알아주지도 않는 재능기부는 그만하면 됐어.’라고 하지만 나의 머리와 심장은 머뭇거리고 있다.
수업에 필요한 재료들이 다 도착했는지 아이들과 통화를 한 후, 학교에 가기 위해 준비를 서둘렀다.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붓는다. 길게 늘어트렸던 머리는 말아 올려 단정하게 매듭을 짓고 빨아 접어두었던 조리복을 꺼내 입었다. 올가을 아이들과 같은 조리복을 입고, 음식 축제에서 또 한 번의 환희를 맛보자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그렇다고 울상을 짓고 갈 수는 없어, 난 거울을 보고 미소를 지어 보았다.
일주일 전, 요리 수업 담당 선생님이 보내준 문자에는 2학기 대부분의 학교 행사가 요리 수업이 있는 수요일에 잡혀 12번의 수업만이 남아있다는 내용이었다. 더는 학교에서 아이들의 요리 동아리를 살펴줄 거란 기대는 안 하기로 했다. 난 이번 2학기 마무리를 잘하고, 웃으면서 헤어질 거다.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교장실 문을 두드리고 교장 선생께 안부 인사를 물으며 미소 지었다. 탕비실에서 커피를 한잔 타들고 선생님들께도 밝은 인사를 드렸다. 고개 한 번 더 숙이고 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나는 교실로 들어서 가방을 내려놓고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점심시간을 아껴 양파와 마늘을 까놓고 쌀도 씻어 놓았다. 칠판에 오늘의 요리 ‘김밥’, 양파 4개, 마늘 10개 까놓기와 쌀 씻어 불린다고 쓰여 있다. 테이블보를 깔아놓은 책상도 정리 정돈이 잘돼 있다. 이제는 미장플러스 (Mise en Place)를 내가 없어도 척척 잘해나가는 것이, 내년엔 내가 없더라도 아이들끼리 요리 동아리 운영이 가능할 것 같다.
여름 방학 전, 아이들과 2학기 첫 수업은 ‘소풍’을 가는 기분으로 시작하자는 의미로 김밥을 만들자고 했었다. 앞으로 아이들이 만들어 보고 싶다던 요리는 많은데, 12개만 골라 수업을 하려니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한 명, 두 명 뛰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름에 아이들이 큰다더니 한 달 사이에 부쩍 커버린 모습이다. 초등학생 같았던 1학년 여자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어 나타났고, 남자아이들은 의젓하게 들어와 까불대기 시작한다. 난 한 명씩 반갑다는 인사로 안아주었다. ‘내 시끼들.’
꺼내 놓은 당근과 시금치를 다듬어 씻고, 물을 올려 시금치 데칠 준비를 마치며, 테이블 위에 마른행주를 깔아 도마를 정돈하고, 쟁반에 얌전히 올리어져 온 칼을 들고 오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법이다. 1학년은 당근을 채 치고, 마늘과 양파를 다지고, 2학년은 햄과 단무지, 맛살을 길이로 썰어 쟁반에 담고, 3학년 선배들은 후배들이 늘어놓은 설거지며 냉장고 정리와 남은 음식 재료를 정리하고 있다.
이제는 분업화가 잘되어 누가라고 할 것 없이 둘러보고, 아이들 서로 필요한 것을 챙겨주는 마음이 기특하다. 휘퍼 머신에 달걀을 풀고 있던 래도가 지단을 붙이기 위해 프라이팬을 꺼내, 재범이와 나란히 서서 닦고 있다.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온 데다 덥고 습해서 그런지 나무 도마에 곰팡이가 빼곡해 분리수거통에 버리고, 없는 살림에 새 도마를 갖췄다. 역시 다른 주방 기물들도 꺼낼 때마다 세척이 필요해 보였다. 전 같으면 투덜대고 대충 씻어 사용했을 아이들이, 내 입에서 잔소리가 나오기도 전에 처리한다.
1학년 후배들이 “이 달걀 다 부쳐야 해요? 선배 힘들어요.”라는 말을 꺼내면, “작년에는 말이야.”라는 첫마디로 시작해 음식 축제 준비로 힘들었던 4달간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너희들이 진짜 힘든걸. 안 해봐서 그래.”라는 말과 험난했던 기억을 담은 표정으로 끝맺는다. “선생님 우리 송편도 만들어요.”라는 불꽃의 질문에 작년 떡 담당이었던 래도가 “떡 얘기하지도 마. 으흑.”하며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쓰러지는 척한다. 이제는 우리 아이들도 라떼를 얘기하는 작은 꼰대가 되었다.
“작년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래요?”라고 불꽃이 묻자, 옆에 있던 작년 팀장이었고,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나범이 동생 방울이가 “나범오빠, 매일 12시가 돼서 들어왔어.”라며 불꽃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나보다 경력이 오래된 요리사들 같다. 집안일로 일찍 가야 하는 우스와 3학년 아이들을 모아 죽순을 꼭 짜서 물기를 없앤 후,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은 죽순 구이를 알려 주었다. 아이들이 돌아가며 지단을 부치고, 당근을 볶고, 햄과 맛살을 구워 김밥에 들어갈 재료의 밑 준비를 끝을 냈다. “자자 얘들아, 마무리하고 김밥 쌀 준비하자.”
밥솥에서 밥을 꺼내 소금과 깨 그리고 참기름으로 간을 해서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죽순과 달걀이 잔뜩 들어간 김밥을 싸고, 썰어 아이들 입에 하나씩 넣어주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햄과 맛살이 들어간 김밥보다 죽순 김밥을 더 좋아했다. 인스턴트를 좋아하던 우리 아이들 입맛이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올해 초다. 작년에도 조미료가 들어가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을 배우면서 입맛에 안 맞는다며 김치를 찾던 녀석들이, 이젠 김치를 찾지 않는다.
“다음 주엔 닭 오븐구이하고 닭볶음탕, 치킨커틀릿을 할 거야. 그다음 수업엔 즉석 떡볶이 할까?” 전원 찬성으로 아이들이 떡볶이에 들어갈 재료들을 칠판에 적기 시작한다. “또 뭐 하지? 10개 정도 더 할 수 있는데.”라는 말에 아이들이 날 바라본다. “왜 10개예요? 우리 수업이 더 없어요?”하고 아이들이 물어보는데 난 할 말이 없었다. “학교에 행사가 많다네.”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생님 행사 날짜를 바꿔 달라고 할까요?” 하며 아이들이 퉁퉁 댄다.
“우리 좀 썰어 먹을까? 이제 2개만 더 싸면 끝이다.” 우리는 김밥 60줄이 완성했다. 아이들은 김밥을 먹으며 만두, 푸딩, 피자, 송편, 햄버거, 냉면, 쿠키, 카레, 팬케이크, 스테이크, 불고기 등 온갖 요리들을 나열하며 고민하고 있다. 그러더니 투표를 하겠다며 단톡에 음식 이름을 적어 내려가기에 집중한 1학년 여자아이들은 김밥을 먹는 것도 잊은듯하다. 난 아이들에게 식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김밥을 싸주고, 아이들은 청소를 끝마쳤다.
아이들 하교를 위해 오는 택시 라이트 빛이 보이자, 아이들이 가방을 들고 인사를 한다. 불꽃이 잠시 멈칫하더니 “선생님 우리 내년에도 요리 수업하죠?”라는 뜬금없는 질문에, 난 아이를 바라보고 웃어줬다. 아마도 수업 중간에 하교한 우스가 “선생님 내년에도 수업하실 거죠?”라는 질문에 대답을 못 하던 내가 걸렸었나 보다. 요리고를 목표로 하는 우스에게 난 지금 아무런 약속도 하지 못한다.
아직 요리사라는 직업을 목적에 두고 아이들에게 요리를 가르치는 일이, 부모님들이나 선생님들에게 크게 주목받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적성을 살려 전문적인 교육을 하기보다, 취미로 배우기를 원한다. 난 여러 번 학교 관계자들과 만나 요리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지만, 현실화하지 않고 있다. 음악이나 미술, 무용, 골프 같은 예체능엔 부모님이나 학교에서도 많은 예산을 들여가며 아이들의 능력을 키워준다. 난 그런 부모님이나 학교의 관심이 부럽다.
나도 언젠가는 '요리는 어려서부터 기초가 필요하다.'라는 관심을 가지는 날이 올 거라는 생각에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현실의 벽이 너무도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