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임 Sep 25. 2023

살기 위해 시작한 요리. 1

요리가 좋아서 시작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3.4학년이었나 수술하고 돌아온 엄마는 밥을 드시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다.   

  

그런 엄마가 어린 나의 눈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그래서 큰맘 먹고 죽을 끓여 드리기로 했다. 엄마가 죽을 끓이던 순간을 기억하려 애썼지만 한 방법이었는지는 알 수없었다. 쌀을 씻어 참기름을 두르고 쌀을 몇 번 볶다가 물을 부어 끓였다. 자꾸 끓어 올라 넘치는 쌀과 물을 달래기 위해 불을 줄이고 휘저었다. 그래도 끓어 넘쳐 냄비를 바꾸었다. 주방을 엉망으로 만들어가며, 난 나름 열심히 저어가며  죽을 끓였다. 죽이 완성됐다. 그릇에 담아 간장과 함께 상에 올려 엄마에게 가져갔다. 상을 마주한 엄마가 날 보는 알 수 없는 시선을 잊을 수 없다.


한 수저 입으로 가져간 엄마가 미소를 지으며 날 보았다. 그리고 한 그릇을 다 드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 난 안도의 숨을 내쉬었었다.

나중에 엄마가 웃으며 말했다. 한 숟가락 입에 물자 겉면만 익은 쌀알이 씹혔다고 했다. 말 그대로 생쌀을 살짝 끓여 만든, 죽처럼 보이는 한 그릇이었다. 밥상 한번 안 차려본 딸이 죽을 끓여 왔는데 안 먹을 수가 없었다고도 했다.

이것이 나의 첫 요리이다. ‘생 쌀죽’


그 후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난 라면 한 번 끓여본 적 없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엄마는 명절이나 조부모님 기일이 돌아오면, 전 부치는 일부터 가르쳐줬다. 사실 이모님들도 오시고 일하는 아주머니도 계셔서 딱히 날 필요로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배우고 싶어 했었다. 전 부치는 일 외에 마늘과 생강을 찧거나 양파와 파 같은 재료를 다듬고 씻는 잔심부름이 나의 일이었다.

엄마가 “서진아! 마늘” 하면 TV 보고 있다 숟가락 들고 쪼르르 달려가 엄마를 바라보면 “한 숟가락만 넣어봐.”라는 엄마 말에 조심스레 넣어 드렸다, 그다음은 깨, 간장, 설탕, 물엿, 참기름, 식초 등 온갖 조미료를 엄마 손에 덜어드리며 한입, 한입, 맛만 보고 다시 TV 앞으로 달려갔다.

정확한 요리라는 걸 엄마에게 배워 본 적은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의 20살, 부모님과 떨어져 영국에 살았다.

부모님 덕에 하숙집에서 밥도 먹고 빨래도 해줘, 편안하게 학교만 다니면 됐지만, 한국 음식이 그리웠다.

유학까지 지원해 주는 부모님이 계셨어도 영국의 높은 물가를 감당하기엔 힘든 유학생.

가끔 아시안 채소를 사러 런던까지 갔었다. 그리고 항상 한식당 앞을 서성거렸다. 나에겐 값 비싼 메뉴판을 가진 한식당은 그저 높은 벽에 붙은 간판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가 90년대 초였으니 런던이라는 커다란 도시에서도 한식 재료 파는 가게를 찾기 힘들어 고추장이며 된장, 간장 등의 한식 재료를 소포로 받았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편안한 하숙집을 버리고 집을 얻어 자취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빨래와 청소를 해주는 사람이 없는 집에서 한식이 먹고 싶다고, 집을 얻어 살겠다는 나의 호기는 일생일대 중요한 선택이었다.      

자췻집으로 이사한 날부터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이 혼자 요리해 봤다. 초·중·고등학생 시절 청소년 연맹과 스카우트 캠프 활동으로 배운 냄비 밥. 그리고 처음 죽을 끓였을 때와는 달리, 쌀을 불려 써야 한다는 것을 배운 사람으로서 자신이 있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쌀을 씻어 불리고 냄비에 넣어 끓였다. 결과는 밥은 설고 바닥은 새까맣게 태웠다. 살아남기 위해 난 밥을 태워 가며 밥 짓는 연구를 시작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태우고 설익거나 죽이 되는 과정을 반복하다 드디어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과 누룽지를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생겼다. 그 무렵 달걀 프라이에 햄을 구워 밥을 먹던 난, 달걀찜에 쌈장을 만들어 삼겹살을 서양 상추에 싸 먹었다.

야채 필러, 긴 나무젓가락, 커다란 국자, 위스크, 소·중·대 냄비, 웍 같은 어설픈 살림살이가 늘어가며 국이나 탕이 있는 밥상을 차렸다. 심지어 쪽파와 당근, 양파를 송송 썰어 넣은 계란말이, 당면이 들어간 달달한 간장 불고기, 양송이버섯을 넣은 매콤한 돼지 두루치기, 버섯·새우·호박으로 만든 전, 각종 채소 샐러드 등이 든 도시락을 쌀 수 있는 실력도 갖추게 됐다.

     

샌드위치나, 쟈켓 포테이토, 피시엔 칩스, 미트파이, 토마토케첩 같은 소스가 들어간 파스타를 먹는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면 부러워하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의 절친이었던 야스코가 “Could you please make my lunch box?” 도시락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그에 난 대답했다. “Sure Yasko.” 어차피 양 조절이 안 돼 잔뜩 만들어놓은 음식을 먹던 나에겐 하나 정도 더 싼다 해도 무리는 없었다.

도시락을 받아 든 그녀는 나에게 3파운드에서 5파운드로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몰려다니던 친구들도 하나둘 주문을 했다.

이 도시락 주문이 나의 첫 음식 장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매일 만들지는 않았다. 귀찮은 날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나의 어설펐던 주방 생활은 끝나는 듯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