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함께한 시간
벌써 대학교 4학년, 아들이 너무 커 버렸습니다.
아들이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까지 같이 있어 달라 했습니다.
호주에서 일하던 전 누구나 가고 싶어 하던 S 호텔 안 유명 레스토랑에서 수셰프로 오라는 러브콜을 받고 있을 때였죠. 솔직히 많이 고민되더이다. 그러나 아들의 부탁인데 어쩌겠습니까. 전 아들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저의 품만 파고들던 어린아이가 훌쩍 커버렸다고 처음 느꼈던 날이, 녀석 중2 때였던 것 같습니다.
차에서 배양토를 내리는데 저를 툭 치더니 35L 커다란 봉투를 가볍게 들고 2층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겁니다. 테라스에 툭 내려놓는 아이의 팔을 “우와~”하며 만져대니 “이 정도야”라며 나의 팔을 꼭 안는 데 힘이 장난이 아녔습니다.
“엄마, 내가 봐주는 거야.”라며 킥킥대고 거실로 들어가는 아들의 등을 보고 ‘아! 이제 저 시끼한테 까불면 안 되겠네.’라는 생각은 했지만,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든든해지더란 말입니다.
그랬던 녀석이 벌써 25살, 키도 크고, 나이도 크고, 그래도 제 눈엔 아직도 아이 같습니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날은 가슴이 설렙니다.
나는 남쪽 끝에 살고 아들은 천안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만남의 장소는 지금 아들이 학기 중 아르바이트하는 독립기념관입니다.
마지막으로 꼬맹이였던 아들과 함께 왔던 독립기념관 앞이 낯설어 두리번거리다 차를 돌리는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분명 독립기념관 정문에서 기다리라 했는데 정문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왜 들어왔냐고 합니다. 자기가 걸어서 나가면 되는데, 주차비가 2,000원이나 하고 금방 나갈 건데 라면서 잔소리를 해댑니다.
“우리 아들 일하고 나오는데 힘들까 봐. 엄마가 일부러 들어가는 거야. 너 정문까지 한참 걸어와야 하잖아.”
아들의 웃음소리에서 씩 웃는 소리가 살짝 들립니다.
주차하고 아들을 만나러 걸어갔습니다.
“어디? 나 주차장에서 걸어가고 있어.”
“엄마 뾰족하게 서 있는 탑 보여? 아니면 힘드니까 그냥 차에 있어.”
“나 아들 보러 갈래. 너 보여. 나 보여?”
“어 엄마 보여.”
머리서 걸어오는 아들을 한 장 찍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달려가듯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와락 안아주었습니다.
아들의 웃는 모습만 봐도 좋네요.
공부할 시간도 없을 텐데,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것보다 열심히 살아주는 아들이 대견합니다.
처음, 가장 낮은 학비와 취업률이 높은 천안 K 대학교로 장학금 받고 간다고 했을 때, 저도 다른 엄마들처럼 ‘더 좋은 데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스스로 정한 진로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우리 아들 효자네, 엄마는 이제 학비 걱정 안 하고 살겠다. 고맙다.”라고 너스레를 떨었었답니다.
4학년이 되도록 수석과 차석을 놓치지 않고 방학이면 세무서, 교육청 같은 공공기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끔 찾아가 안아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런 아들 자랑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들의 낯빛이 그리 밝지가 않았습니다.
“아들 취업 준비하느라 힘들어?”
자격증은 다 땄고 공모전에 제출한 작품이 하나는 상을 탔는데 하나는 쟁쟁한 경쟁자들에게 밀리고 말았답니다.
“괜찮아. 하나라도 상 탔으니 월매나 좋아. 우리 맛난 저녁밥 먹자. 그리고 딸기잼이랑 사과잼 가져왔다. 기숙사에 놓고 가자.”라며 뒷좌석에 놓인 가방을 가리키니 얼른 가방을 열고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너무 많은데?”
“네 룸메도 주고, 여자 친구도 주고.”
“나 지금 독실 쓰고 있어. 룸메이트 없어.”
같이 방을 쓰던 룸메이트가 코도 많이 골거니와, 도서관에서 늦게 들어오면 조심스러워 독방으로 바꿨답니다.
이런 녀석이 아니었는데, 취업 준비로 예민한가 봐요.
“우리 여름엔 펜션 빌려서 엄마가 맛난 거 해주고 갈까?”
“나 2학기에 인턴 가야 해. 졸업조건이야.”
“그럼 취업 나가는 거야? 어디로?”
“일단 P그룹에 1 지망했고, 2 지망으로 D그룹에 넣었는데. 이번엔 아예 D그룹은 1 지망 한 아이들 서류만 접수했다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인턴 뽑는 숫자가 많이 줄었어. 예전엔 안 그랬다는데.”라며 말수가 적은 아들이 계속 요즘 일자리에 관한 이야기만 쉬지 않고 얘기하더라 말입니다.
2025년 5월 KOSIS 통계청에 따르면 청년 실업률 6.6%, 청년 실업자 26만 2천 명이랍니다. 아직은 대학생이라 여기에 끼지는 못하지만 벌써 걱정이 태산과 같은가 봅니다.
청년회장의 연세가 60세, 부녀회장님의 연세가 60대 중반, 마을 평균 나이가 60대가 훌쩍 뛰어넘는 시골에서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청년 일자리 & 창업'이라는 사업이 일어났습니다.
도시재생과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업은 지방자치단체 와 사회적 기업 그리고 공무원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청년실업에 관심이 없었으나 귀촌하고 청년들과 다소 젊은 성인들에게 창업에 필요한 요리를 가르치며 청년일자리사업의 여러 가지 민낯을 봐왔었습니다.
시골에서 시작한 청년 일자리 사업은 직장을 구해준다거나 창업을 도와줄 테니 귀촌과 귀향을 홍보하며 ‘Come on. Come on. will give you a chocolate.’라고 열심히 꼬셔댔었죠.
그리고 젊은이들은 피리 부는 사나이를 따르듯 모여들었고, 될성싶지도 않은 ‘청년 창업 & 일자리’는 정확한 계획도 없는 계획서를 가지고 교육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청년들은 단기간의 교육으로 서로 다른 일터로 보내졌고, 많은 청년이 제대로 된 일을 배우기보다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었습니다. 더군다나 정말 일자리를 원해서 온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월급을 주면서 너무 일을 많이 시키잖아!’라는 식으로 일터에 강한 반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교육기관이나 사업주 그리고 청년들은 일에 대한 열정보다는 더욱 쉽게 더 게으르게 나랏돈을 챙겨 가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었지요.
청년 창업은 어떠했을까요? 주로 음식점 창업이 많았습니다. 음식이나 식당에 관련된 컨설턴트 없이 단기간의 짧은 교육으로 창업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업 막바지에 이르자 저에게 연락이 왔었습니다. 판매해야 할 음식과 청년들의 실력을 점검해 달라는 요청이었지요. 판매해야 할 음식도 음식이지만, 30년을 바라보는 요리사인 나도 창업이란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이 실력으로 음식을 판매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사업비로 받은 돈은 어디로 갔는지, 받은 돈의 반도 안 되는 돈으로 식당 시설에 인테리어에 교육까지 해야 했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쓸데없는 수업과 견학은 인제 그만두고 군과 상의하여 기간을 늘려 요리 실력을 더 쌓아야 한다는 의견이었지요.
이러한 상황에 청년일자리 관계자와 군 관계자들은 모여서 이야기합니다. 실력 있고 머리 좋은 청년들은 왜 시골에 들어오지 않는지 걱정이라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건의를 했습니다.
“여기 모여계신 여러분들의 공부 잘하고 성실한 아이들은 왜 데려오지 않느냐? 서울에서 광주에서 외국에서 좋은 대학 다녔고 졸업해 이름 있는 회사 다닌다는 자랑만 하지 말고요. 연고 없는 청년들을 불러들이지 말고, 청년 사업에 관련된 군 관계자분들이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귀향을 권한다면 우리 군은 우리나라 어느 군보다 청년이 살고 싶은 고장이 될 겁니다.”
이후 저는 어떻게 됐을까요?
필요는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지만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게와 칼을 든 전사가 되었습니다.
오지게 싸웠습니다.
‘청년들이 사는 시골, 꿈은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꿈이 현실로 되려면 여기 계신 어르신들이 힘을 써야 합니다.’
저는 딱 찍히고 말았지요.
그나저나 다른 회사들은 인턴에 선정된 아이들을 발표했는데 P그룹만 소식이 없다며 아들이 전전긍긍합니다.
내가 해줄 거라곤 1박 2일 동안 맛난 거 먹고 소주도 한잔 하며 밤새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길을 바르게 선택하고 걸어준 아들이 앞으로도 잘할 거라는 걸 전 믿습니다.
아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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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연락이 왔습니다.
인턴이 됐다네요.
그동안 졸인 마음 많이 감추었었나 봅니다.
목소리가 너무 밝아요.
저도 영락없는 아들 팔불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