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아직 몇 달 남았을 때다. 지하철 혜화역사에서, 서울시 <50+재단>의 광고판을 몇 달째 보았고, 지나쳤다. 일주일에 한두 번 그곳을 지날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광고는 궁금했지만 동시에 불쾌했다. <50+재단>은 쉰 살 넘은 사람들의 평생교육기관쯤인 듯했는데 그곳에서 한다 하는 교육 콘텐츠가 제법 신선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고 내가 벌써 그 나이 대에 끼어서 뭔가를 할 수는 없지 않겠나? 그런데 웬 관심? 거기를 궁금해하는 내가 싫었다.
칠십 넘은 친정엄마도 평생주부대학을 나가고, 시어머니도 일주일에 한 번씩 주민센터에 나간다. 컴퓨터도 배우고, 동양화도 그리고, 노래교실도 가고. 집 안에만 틀어박히지 않는 어머니들을 응원해마지 않았고, 가끔 가면 컴퓨터도 가르쳐드리곤 했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런 델 가서 뭘 배우겠다고 앉아 있을 수 있겠나. 노인도 아니고!
그랬으나 궁금함을 못 견디고 결국 50+재단을 인터넷 검색창에 쳐봤다. 정말이지 검색만 해보려고 했다. 홈페이지는 촌스럽지 않았고 교육과정에 전문적인 분야도 꽤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노래교실은 없었다. 내 관심 강좌는 전자출판전문가 과정이었다. 강사로는 편집자 출신 출판사 대표, 전자책 출판공동체 대표 그리고 작가, 나름 이름 있는 셋이었다. 안심했다. 수강료도 저렴했다. 수강생들의 글을 모아 전자출판한다는 강의 목표도 마음에 들었다. 찜찜함을 안고 일단 수강신청을 했다.
강의실에 들어 간 첫날 나는 세 번을 놀랬다. 첫 번째는 강의실에 앉아있는 수강생들의 찌든 얼굴들 때문이었다. 설마 하며 주춤거리고 들어갔는데 강의실이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했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면면들은 늙었다기보다는 어두웠다. 괜히 왔나 싶고 돌아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다음으로 놀란 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할 때다. 그들이 바로 직전까지, 간혹은 지금도 하고 있는 일들의 화려한 스펙(?) 때문이었다. 걷기운동가(이 분은 십여 년 넘게 걷기를 하면서 걷기 관련 행사를 조직했고 1만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진 온라인 카페를 운영한다), 동화작가, 여행 작가, 출판사 대표, 웹툰 작가, 목공 장인 등. 한 사람 한 사람 정말 놀랄만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쓰고 싶은 것’이 있었다. 본격적으로 저자가 되어보겠다는 사람, 자서전을 만들어서 선물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전자출판에 사업적 관심을 드러냈다. 짧은 시간 동안 두 번을 놀래고 나의 오만과 편견을 부끄럽다 여기고 있을 때, 한 여자가 왠지 약간 화가 난다는 투로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세 번째 놀란 일이다.
여자의 말은 이랬다. ‘책을 쓰겠다는 이 열망이 자기 계발의 추세에 따른 천박한 욕망이라는 것, 독서가 주는 순수하고 숭고한 즐거움을 이런 식으로 훼손하는 곳에 왜 자기가 와 있는지 모르겠다’. 황당한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책에 대한 일종의 신앙이랄까. 그러나 여자의 마음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이해되는 걸 보니 나 역시 책 숭배자 측인 거다.
<50+재단>을 오기 전까지 가졌던 모든 선입견이 첫날 허물어졌다. 그리고 석 달쯤 수업을 받다 보니 문제는 그렇게 관념적인 것 속에 있지 않았다. 나이는 문제도 아니었고 화려한 스펙 따위도 소용이 안됐다. 책의 숭고함이니, 천박한 욕망이니 그런 거 다 필요 없었다. 일단 지각하지 않고 매주 출석을 하는지, 시길(Sigil: ebook 편집 소프트웨어)을 열심히 배우고 연습하는지, 글은 쓰고 있는지, 그런 실재적인 것들만이 문제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이 43명 중 일고여덟이다. 그중 5명만이 그 강좌의 목표, 전자 문집 제작에 참여했다. 편집 작업은 내가 도맡아 했다. 채 마무리되지도 않은 글들을 받아놓고 며칠 밤을 새웠다. 조촐한 출판기념회까지 마치고, 웃는 얼굴로 헤어지면서 아쉬운 건 역시 나이였다. 50년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라, 50년만큼 첩첩이 쌓아 온 습관과 태도들이었다.
‘신의 몽둥이 앞에서도 제 방 문지방 하나를 못 넘어선다’고 했다던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의 말이 떠오른다. 늙음은 하나의 문턱이다. 변하지 못하고 고집스러워지기만 하는 몸은 새로운 배움 앞에 언제나 놓일 문지방이다. 그리하여 나이 오십은 무겁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다면 저 문지방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