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개를 너무 좋아했던 자칭 ‘개파’인 저자와 사람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새끼 고양이 한 마리가 한 집에 살게 되었다. 고양이는 처음이었지만 개를 사랑하고 개의 죽음에 상처 받을 줄 알았던 저자에게 작은 고양이 한 마리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러나 고양이는 이 집에 온 지 두 달이 되도록 곁을 주지 않았다. 항상 어딘가 구석자리를 찾아내어 몸을 숨기고 있었고, 쓰다듬는 손길은 가차 없이 할퀴었다.
환상을 갖고 동물을 키우고자 하는 자는 짖고, 할퀴고, 아무 데나 실례를 범하는 동물에게 바로 의문을 가질 것이다. ‘무슨 고양이가 이래?’ 그게 아니라면 ‘나는 키울 자격이 없나 봐.’ 자신과 동물이 불화하는 이 사태의 원인을 동물에게 투사하거나 아니면 자신에게 돌리기. 그러나 「내 인생의 첫 고양이」(김하나, 『힘 빼기의 기술』)를 쓴 김하나는 자신을 거부하는 고양이에게 “지치지 않는 구애자”였다. 그리고 드디어 고양이들이 만족스러울 때 내는 ‘그르르르르릉, 그르르르르릉’ 소리를 듣게 된다. 고양이는 이제 누운 그녀의 배 위에 가만히 올라와 그 작은 몸뚱이의 체온을 나눠준다.
동물과든 인간과든 타자와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그를 나로부터 떼어낼 수 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할 때와 그렇지 않을 때 해결 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싫으면 헤어질 수 있고, 버릴 수 있고 하는 식이 아니라 만약 그와 내가 함께 사는 것을 숙명처럼 믿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게 될까? 같이 살아갈 방도를 강구하게 되겠지? 어떻게 하면 고양이가 할퀴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이미 할퀴었다면 할퀸 자국이 흉터로 안 남게어떤 처치를 해야 할지. 저자는 그랬던 것 같다. 고양이 하쿠가 아무리 거부해도 계속 구애할 수 있었던 힘은 함께 산다는 사실에는 일단 그녀가 재고의 여지를 두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프란츠 카프카, 그는 아버지와 불화하고, 가족제도에 회의를 갖고, 직장에 나가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했는데 죽을 때까지 그 무엇 하나도 놓지 않았다. 일기를 정말 그렇게 써대고(!), 편지를 그렇게 써대고(!) – 애인에게, 아버지에게 쓴 편지가 책 몇 권의 분량이다- 하면서도 살았던 것은 그들과의 분리라는 것을 애초에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명 공동체인 냥, 그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마주하고, 어떻게든 살아내었다.
김하나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썼다.
"한 마리의 고양이가 한 사람의 세계를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내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는 걸 안 하쿠는 점차 내 앞에서 느긋하고 나른해졌다. 화병 옆에 앞발을 모으고 얌전하게 앉아 있거나 집 안의 가장 따뜻한 바닥에 길게 누운 고양이를 보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모든 고양이 집사가 알고 있듯이 고양이들은 불가사의하게도 ‘가장 그림이 되는’ 위치를 귀신같이 찾아 우아하게 정지 동작을 취해준다. 내 집은 살아 움직이는 아름다운 액자를 갖게 되었고, 그 액자는 바쁜 세상 속에서도 아랑곳 않는 속도를 유지했다. 고양이는 인간의 시간을 지배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김하나, 힘빼기의 기술)
숨 가쁜 하루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변함없이 느긋하게 움직이며 한 폭의 그림이 되고 있는 하쿠를 만난다. 호흡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지는 저자는 어느새 하쿠의 속도에 동화되어 가면서 삶의 또 다른 리듬을 이해하게 된다. 하쿠와 함께 함으로써 받는 선물이다.
할퀴는 고양이는 내다 버릴 수 있고, 싫은 아버지는 떠날 수도 있고, 싫은 직장은 때려치울 수 있다고 한다면 얻지 못할 선물이다. 당장은 버리고 떠날 수 있을지 모르나, 어딘가에서 어느 순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벌어진 일을 지금 여기서 끝장 내지 않으면 ‘왠지 사는 게 맨날 똑같다’고 한숨 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이 능선을 넘어가야 다른 길도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