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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Dec 02. 2021

'있는 그대로 인정'
안해도 좋으니까

소소하게 철학적인

'있는 그대로 인정' 안 해도 좋으니까 '차별 금지법'이나 제정하자. 


올 2월 24일 제주 퀴어 문화축제 공동조직 위원장 김기홍이 죽었고, 3월 3일 트랜스젠더 육군 하사 변희수가 죽었다. 둘 다 자살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죽음을 추모하는 쪽에는 '사회적 타살'이니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라는 댓글이 올라와 있다. 사람이 죽어나갈 때마다 올라오는 똑같은 문장들에 욕지기가 나온다. 그것 말고 그럼 뭐? 다른 적당한 말도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글은 힘이 없다고들 했던가. 정말 그런가? 껍데기만 남은 이런 말 말고 다른 말, 힘 있는 말도 있지 않을까? 말은 어떻게 힘을 갖는 걸까?


나는 성소수자에 대해 관심이 없다. 그들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퀴어축제를 해도 상관없고, 내 자식이 퀴어에 관심을 갖고 관련 영화를 많이 보지만 괜찮다. 주민센터에서, 은행 창구에서, 편의점에서 성소수자가 근무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무관심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보다는 착하다는 표시일까? 성소수자의 자살이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는데, 그  사회는 무관심한 자들의 사회인가, 혐오자들의 사회인가?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혐오자는 아니겠지. 무관심한 자들이거나 당사자 혹은 활동가들. 


당사자는 죽었으니... 활동가들이라면 그런 댓글이나 쓰고 있을 시간은 없을 것 같고. 무관심한 자들은 왜 저런 빈말, 아무런 울림도 주지 않는 공허한 말을  찍찍 써대는가? 성소수자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도 누군가 죽었다는 뉴스에는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다. 누가 죽었는데 그 죽음이 자살이고 죽은 그가 성소수자라고 할 때, 이럴 때는 평소와 같은 무관심으로 포커페이스 하는 게 어려워지는 것이다. 혐오만큼이나 무관심이 죄인 것 같고 그러나 혐오는 적어도 아니었다고 표시해서 혐오자들과는 다른 종자로 보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인가?


댓글들 하나하나가 내뿜는 기운이 다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를 포함한 추모의 댓글들에는 기운이 안 느껴진다. 거의 끝난 일의 마지막 온점을 찍듯 댓글들은 끝을 예고하는 미약한 기운이다. 빨리 잊으려고 서둘러 하는 인사처럼 그런 댓글에서는 어떤 기대감도 거부하는 단호함이 박혀있다. 혐오의 댓글과는 내용만큼이나 완전히 반대인 힘의 크기다. 혐오의 댓글에는 곧 주먹이라도 날아들 태세가 느껴진다. 보는 사람이 바로 넘겨버리거나 다른 페이지로 넘어가는 건 그 기운에 압도되었다는 뜻일 거다. 혐오는 대단히 적극적인 힘이다. 


변희수 하사가 죽자 각계에서 한 마디씩 한다. 

군 인권센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민주노총, 트랜스 해방 전선, 성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행동 등.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애도-반성-구호'다. 난 왜 성소수자들이 굳이 자신을 드러내고 법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으려고 하는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알게 되었다. 저렇게 대단한 기관들이 한 마디씩 한다해도 단 한 사람의 직장도 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다. 변희수 하사와 함께 근무했던 동료 군인들, 상관들 중에는 변희수에게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고 힘을 주었던 이들도 많다고 한다. 정 있게도 말이다. 그런데 그 정(情)이 변희수가 먹고 살 직장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차별 금지법 있었으면 변희수의 비극도 없었다'라는 기사가 떴다. 그랬을까? 

어쩌면 법제화로도 비극을 막을 수는 없었을지 모른다. 늦출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직업을 갖고 살아가면서도 무관심과 혐오의 시선으로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책임은 변희수의 몫일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게 죽어도 싫은 사람도 있다. 무슨 이유로든 싫은 사람은 있다. 성소수자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호감인 사람이 없듯이. 


차별 금지법(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장애, 인종,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핑계 삼아서 고용이나 교육·행정서비스 이용 등에서 누군가를 불리하게 대우하는 ‘차별’을 막고 시정하도록 하는 법)이 소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기반이다.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바닥에서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러고 난 다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을 때려 줄 것인지, 애원을 할 것인지.... 그 판단은 모든 사람의 숙제처럼 성소수자도 똑같이 고민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차별 금지법으로 성소수자들이 얻는 것은 어떤 특혜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고민을 할 권리이다.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처음 들어가 봤다. 검색어에 '성소수자'를 넣었더니 최근 1년 동안 31건의 관련 청원이 나왔다. 예상할 수 있다시피 두 부류다.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청원과 반대 청원. 내 예상은 옹호하는 즉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 유의 청원이 더 많을 것으로 그리고 동의 수도 더 많을 것으로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기사들의 댓글에서와 마찬가지였다. 반대의 글은 수적으로도 우세했을 뿐 아니라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더 강했다. 우리 사회에 반대하는 쪽이 더 많다는 뜻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아니라고 믿고 싶다. 다만 반대하는 글에서의 강한 기운처럼 반대하는 목소리는 기운만큼이나 강한 행동력을 갖고 있다. 굳이 반대를 표명하는 행동력이다. 기운이 약한 무관심의 목소리는 행동하지 않는다. 말이 행동으로서의 끝이다. 


차별 금지 법안 국회 상정과 통과에 비교적 적극적인 당은 소수당인 정의당밖에 없다. 따라서 차별 금지법의 법제화는 요원하다. 다수당인 여당과 야당은 차별 금지법을 입 밖에 꺼낼 수 없다. 정당은 행동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움직인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기운, 예컨대 성소수자를 절대 용인하지 않는 개신교의 눈치를 본다. 매주 같은 설교로 반대의 관점을 학습하는 사람들은 선거 때 부동의 득표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미 확보된 표를 걷어찰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관심층은 성소수자 차별 금지법 때문에 지지 정당을 바꾸지 않는다. 무관심층은 사실 정당이 내세우는 공약이 무엇인지에도 무관심하다. 그래서 설령 개별적으로는 차별 금지법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정당이 하는 공약을 자세히 들여다볼 만큼 관심이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차별 금지법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당에 혹은 반대하는 당에 표를 주고 만다. 무관심층은 차별 금지법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 표를 준다는 의미에서 다수당에게는 또 하나의 부동층인 것이다. 그러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반대층의 표를 잃을 필요가 없다. 


성소수자에 반대층보다 무관심층이 실제로 이 사회에 더 많다고 해도 반대층이 다수인 사회보다 더 좋은 사회는 아니다. 무관심의 악을 다시 떠올린다. 


무관심은 언제 관심으로 돌아서는가. 이성애자인 내 자식이 동성애자가 될 일은 없을 텐데, 내가 당사자가 될 일은 없을 텐데 어떻게 저절로 관심을 갖게 되길 바랄 것인가. 무관심은 목소리가 없다. 목소리가 없으니 그 반향도 없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박희수는 앞으로 너무 많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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