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를 읽을 기회가 많아진 걸 보면 붐인가 보다.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읽고 독서토론을 한 게 한 주 전인데 이번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다. 부커상 최종심에 오른 여섯 편 중 하나가 되었다고 짙은 녹색 표지에 새빨간 띠지가 가는 곳마다 눈에 띄었다.(마음에 드는 색의 조합이다) 가는 곳은 물론 뭐 온라인서점이나 북로그 북스타그램 같은 애서가와 북웜들의 페이지이니 당연하다.
송강호 배우가 칸의 수상소감에서 밝혔듯 상을 목표로 작업하는 예술가는 없다. 다만 한 예술가의 성취가 그가 속한 분야의 위상을 바꿔놓기도 하니 상에는 그에 걸맞은 역할이 있는 듯하다. 정보라의 <저주토끼>가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의 후보로 선정됨으로써 그동안 국내에서 홀대받았던 장르문학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언론이 대서특필하고 책 광고 시장이 북적댄다. 장르문학이 알려질 기회가 조금은 더 늘어날 것이므로 이 분야의 창작자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좋은 일이다.
사실 독자는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가리지 않는다. 재미있고 좋은 책이면 된다. 그런데 좋은 책을 가르는 기준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이 있다. 문학권력의 자장 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독자는 의도치 않게 장르문학을 도외시하는 흐름에 편승하게 된다. 독자의 신체가 순문학이라 일컬어지는 문학의 주제와 스타일로 체화되는 것이다. 이런 독자는 장르문학에서 다루는 속도감 있게 전개되는 사건 중심의 서사, 비현실적인 세계를 수용하기 어렵다. 가독성은 좋은데 너무 가볍다고 느끼거나 거기서 그리는 색다른 세계를 어린애들의 유치한 상상으로 여긴다. 몸에는 소름이 돋고 구역질이 난다. 잠자리가 뒤숭숭해지면서 밤잠을 설친다.
<저주토끼>를 읽으면서 그랬다. 가독성이 너무 좋은데 그게 불만이고, 내 안에 머물 필요가 조금도 없는 빠르게 흘러나가는 문장들, 사건 중심으로 이어져 나가는 문장들이 가볍게 느껴졌다. 두 시간 남짓을 푹 빠져서 훌훌 읽고 나서는 문학은 왠지 재밌기만 하면 안 되는 게 아닌가, 괜히 불안하다. 이런 공상(!)에 능한 작가라니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인 인간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길들여진 몸을 가진 중년 독자의 반응이다.
<저주토끼>에는 표제작을 포함해서 열 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첫 작품 <저주토끼>는 이렇다.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 살던 집, 할아버지는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 직업적 금기인,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깨고 저주토끼를 만든다. 저주토끼의 복수는 상대의 가업과 재산은 물론 3대를 참혹하게 멸하고서야 끝이 난다. 할아버지는 그 후 말없이 사라졌다. 저주토끼의 잔혹함만으로도 공포스러운데 이야기는 이렇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반전과 아이러니. 모든 작품을 마지막까지 읽어야 한다. 열 작품을 다 읽고 난 후 알게 되었다. 장르소설에 있어 가독성은 –내게 불만스러웠던 그 가독성은- 필수다. 그 속도감 때문에 마지막의 반전이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인물의 내면을 묘사하고 탐구하는데 중점을 두는 문학에 익숙한 독자는 장르문학의 속도감에 얼떨떨하지만 그 속도감은 장르문학의 작가가 추구하고 독자가 원하고 즐기는 핵심이다.
<저주토끼>는 SF보다는 호러적 요소가 많다. 환영 혹은 유령이 많이 등장한다는 면에서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유령은 공포이기보다 위안이다. 이 세상의 속도로부터 배제된 고독한 자들이 만들어내고, 그런 자들 앞에 기어코 나타나서 함께 살아주고 위로를 건네는 유령들. 그 위로의 유령들 때문에 정보라 작가의 소설은 애잔하고 따뜻하다. 그래서 순문학에 중독되어 편협하게 되어버린 중년의 독자도 충분히 젖어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