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니 Sep 06. 2022

정지돈_산책과 글쓰기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에 실린 단편 소설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정지돈 작가의 글을 접했다.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0주년 특별판』은 그간 젊은작가상을 받은 작품들 중 수상작가들이 뽑은 작품 베스트 7로 2019년에 묶인 선집이다. 지난 십년 간 소설가들은 어떤 이슈에 관심을 두었는가 즉 한국사회는 어떤 문제상황과 담론들을 생산하고 있었는가를 돌아볼 수 있었다. 다만 뜬금없다 여겨지는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정지돈의 것이다. 이 작품집을 토론하는 책모임에서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전혀 토론되지 못했다. 내 취향에 반하는 작품은 아니라는 이도저도 아닌 한 마디를 내가 했을 뿐이다. 나는 인물이든, 책이나 그림이나 음악 등 참조할 거리가 풍부한 글을 좋아한다. 읽다가 멈춰서 그림을 찾아 감상하고 음악을 찾아 듣는 일 인물을 검색하고 책을 인터넷서점 장바구니에 넣곤 하는 일. 「건축이냐 혁명이냐」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소설이긴 한가?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첫 문장은 "이구는 누구에게도 딜런 토머스와 버로스, 헨리 밀러를 읽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이다. 이구는 대한제국 고종의 손자, 영친왕의 아들이다. 이구의 기구한(?) 인생 궤적을 훑어가며 전후 한국 건축의 역사까지 더듬는 이 글은 과연 어디까지가 팩트고 어디가 픽션인지 구분이 안 된다. 저자는 2015년 《씨네21》과의 인터뷰, 기사제목 "나는 후장사실주의자다!"에서 "일기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그 셋의 경계에서 써내려간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인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특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읽고 이것은 소설인가?라고 묻는 일은 소설에 대한 굳은 표상을 장착하고 있는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자연스러운 질문이 되겠다.



사실 2021년에 출간된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을 리뷰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다. 그리고 내게 두 번째인 정지돈의 이 산문집을 읽고서 먼저 읽은 「건축이냐 혁명이냐」의 기술방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쓰는 작가 군'이라는 뜻. 소설인 앞 작품과 산문인 뒤 작품 모두 소설도 산문도 아닌 그 경계에 있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이라는 부제인지, 광고문구인지가 덧붙여져 있는데 '걷기'나 낭만적인 '산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걷기와 산책을 소재로 삼기는 했으나 이 소재가 나아가는 방향은 꽤나 철학적이다. 철학적이라 철학자의 책과 문장들이 많이 인용되었고 인용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인용'에 대한 정지돈의 생각은 분명하다. 위의 인터뷰 글에 따르면 정지돈은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제일 잘하는 건 인용이다. 문학은 세계의 인용이다. (중략) 후장사실주의는 문학의 인용이다. 그러므로 후장사실주의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다.” 후장사실주의(Analrealism)가 뭔지를 저자가 설명하는 대목인데,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나오는 오한기·이상우·박솔뫼 소설가, 금정연 서평가와 그 밖에 강동호 평론가, 황예인·홍상희 편집자가 처음 멤버이다. 젊은 문인 8명은 2015년 독립출판물 축제 때, 문예지 analrealism vol. 1을 출품해 논란과 함께 기대를 모았었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랬는지, 이제서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후장사실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다만 후장사실주의가 작가가 위에서 밝힌 바, "세계의 인용의 인용"이라면 후장사실주의의 이념(?)은 그들에게서 계속 작동하고 있다.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인용'을 촘촘하게 실행하고 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도 그랬다. 텍스트의 인용은 정지돈에게 그 자체로 문학이 된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에게는 현실이 픽션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픽션을 다시 픽션화하는 작업일 뿐이다. 문학은 현실을 다시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도 같은 말이다. 즉 정지돈에게 논픽션과 픽션은 이분법으로 나뉘지 않는다.



사회와 지옥은 너무 긴밀히 접합되어 있어 지옥을 떼어내면 사회가 망가진다. 이를테면 지옥철이 없고 차가 막히지 않는 출퇴근 시간, 모든 사람이 원하는 시간만큼 일하고 자유롭게 이동하는 사회는 사회가 원하지 않기에 불가능하다. 나인 투 식스를 유지해야 하는 필수적인 이유에 대한 담론은 사회의 유지를 위해 우연히 구성된 픽션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하철은 독서하기 가장 좋은 공간이다. 픽션에서 픽션으로 갈아타기. 사회는 픽션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픽션 트랜스퍼로 유지된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하철에서 책이 아닌 스마트폰을 보지만 스마트폰도 픽션이다.... 폰으로 유튜브를 보건 틱톡을 보건 웹툰을 보건 핵심적인 사실은 같다. 사람들은 픽션을 환승하고 있으며 픽션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는 사실이다.『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167-168쪽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곳곳에서 이분법에 반대하는 작가의 태도가 드러난다. 시민과 예술가, 소설과 에세이, 픽션과 논픽션, 정치와 예술 등은 대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246-247쪽) 그렇다고 상대주의도 진실의 모호함을 말하는 포스트모던 쪽도 아니다. 이는 둘 다 "우리 사유를 막는 구멍 마개"이며 "우리에겐 새로운 구분선,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떤 구분선? "무엇이 세계의 진짜 모습을 더 잘 포착했는가. 무엇이 우리의 본성 또는 실재에 더 가까운가"라는 질문을 안 하기, "언어-예술이 세계의 진실 또는 내면의 본성을 표현하거나 표상한다는 관점을 포기하기"(247쪽)



그리하여 산책과 글쓰기의 '유일한 공통점'이 나온다. 의미를 찾지 않는 것,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지만 멜랑꼴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 것,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느껴는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



울프와 발저의 산책이 좋은 이유는 그들이 걷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않았고 우울해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들의 산책은 정체성을 잃고 헤매는 것이었지만 멜랑꼴리해지거나 심각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걸을 때만 진정으로 쾌활해진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산책과 글쓰기가 가진 유일한 공통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젠가 집으로 돌아가거나 결말을 맺어야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상실한 어느 지점에서, 주제와 의도, 인과와 의무를 망각한 지점에서만 진정한 글쓰기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95쪽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은 산문으로 시작하고 일기 형식의 꼭지가 있고 '산책과 글쓰기'라는 소재를 일관성 있게 갈무리한 소설이다. 이 책은 시작과 끝이 있을 뿐 그 중간은 저자의 생각과 경험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디로 향할지 예측할 수 없는 온갖 형태로 쓰였다. 정지돈이 만약이라도 이 책에서 주장한 것이 있다면 계몽주의자의 냄새는 전혀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 모든 주장을 곧바로 수행하고 있는 텍스트이기에, 주장하는 바와 글이 기막히게 일치하고 있기에 나는 놀랍고 한 번도 마셔보지 못한 새 공기를 마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추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