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로 시작하는 책 제목이 있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해보니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시집이다. 자세히 보면 이쁜가? 사람이 그런가? 꽃이 그런가?
며칠 전 조카가 카톡에 올린 옛날 사진에서 돌아가신 할머니 사진을 봤다. '어, 할머니 오랜만이네' 하고 사진을 다운로드해서 한껏 확대했다. 할머니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그런데 할머니가 우리 할머니 같지 않았다. 문지르는 쪽으로 털이 눕고 마는 저 오래된 털 코트가 분명 할머니 것이고, 기름한 얼굴에 짧은 파마머리, 우리 할머니가 맞는데 확대하고 확대해서 할머니의 눈 코 입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니 내 기억 속의 할머니가 아니다. 자세히 보았는데 낯설다. 예쁘지가 않다. 골목 저 끝에 보여서 '할머니~' 하고 뛰어갔는데 낯선 사람이 '넌 누구니?' 하는 것만 같다.
갑자기 내가 싫어진다. 십수 년을 같이 살았던 할머니의 얼굴도 못 알아보다니. 저 사진 내가 찍었는데. 새로 생긴 자동카메라를 자꾸 써보고 싶어서 추운 날 굳이 할머니를 옥상 장독대까지 올라오게 해서 찍은 건데. 할머니와 같이 사는 동안 할머니 얼굴을 자세히 안 봤나? 예의 그 무감 무심(無感無心)이 그때에도, 그때부터도 작동했단 건가? 너무하다. '할머니 미안해요.... 근데, 할머니 이목구비가 원래 그렇게 생겼었어? 작지만 날카롭지는 않은 눈, 코는 아빠 것처럼 크고, 립스틱을 바르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입술은 얇게 좌우 균형이 잘 잡혀있고. 그러네, 내가 할머니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본 적이 없네.' 낯선 얼굴 맞다.
국민학교 시절 어느 날부터의 기억 속에 할머니가 있다. 그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는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가 해 준 밥을 먹었고, 할머니 옆에서 잤다.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우리 세 남매를 챙기고 거둬주셨다. 살림 밑천 큰 손녀와 막내 손주를 중간의 나보다 더 챙겨서 때때로 할머니를 미워했다. 신문지로 내 생애 가장 크게 접은 종이학을 벅벅 찢어놓은 남동생을 두둔하시다 고래고래 고함치는 내 악다구니를 감수하기도 하셨는데... 자세히 보면, 할머니는 된장찌개의 간을 보고 있고, 뒷마당에서 하얀 면 속옷들을 널고 있고, 발 나왔다고 이불을 덮어주고 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그 많은 삶의 장면들이지 할머니의 이목구비가 아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고 쓴 시인도 본다는 것을 단지 시각에 관련해서 얘기한 것이 아닌 거다. 시각적인 면에서만 말한다면 어떤 사람도, 어떤 사물도 자세히 보아서 예쁜 건 하나도 없다. 자세히 보면 기괴하다. 예쁘다고 하는 얼굴을 몇 십 배 확대시켜 자세히 보면, 동굴 같은 모공과 그 속에서 기생하는 뭔가를 발견해서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꽃 한 송이를 핸드폰으로 찍어 확대 시켜보면, 꽃인지 뭔지 구별되지도 않고 그러므로 예쁘다고는 더욱이 말할 수 없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그때 보는 눈은 마음으로 보는 눈이고, 그때 예쁨은 형태를 넘어서는,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무엇들일 거다. 할머니와 함께 스쳐가는 장면 장면들 같은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