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예술가를 키우는 '아티스트 데이트'
'아티스트 데이트'를 들어보셨는지? 줄리아 카메론이 <아티스트 웨이>에서 제안하는 실천 사항으로는 '모닝 페이지' 외에도 '아티스트 데이트'가 있다. 내 안의 창조성을 일깨우기 위한 내 안의 예술가와의 데이트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내가 원하고 기쁜 일, 영감을 불러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다. 내가 즐겨하는 아티스트 데이트로는 서점 방문이 있다.
중학생 때 종로에 있는 영풍문고, 교보문고에서 느낀 황홀감을 여전히 기억한다. 영풍문고에 들어서자마자 거울 천장을 올려다보며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기분! 교보 핫트랙스를 채운 색감 좋고 아기자기한 문구들! 음반 코너에서 다양한 시디를 들어보고 하나 둘 사모으던 기쁨! 마음 맞는 친구와 함께 좋아하는 가수의 사인을 받아온 기억 등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서점에서 불편한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1호선 지하철에서 내 속을 확인하던 최악의 기억도 있다. 1호선 지상에서라 다행이었지.)
최근에 광화문 교보에서 아티스트 데이트를 만끽했다. 아이들과의 한나절, 친구와 만날 약속 사이에 붕 뜨는 시간을 이용했다. 홀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이라니, 낯설고 황송한 순간이었다. 교보의 시그니처 향에 취한 채 예술 카테고리에서 외국서적을 실컷 구경했다. 드로잉, 디자인, 사진집을 뒤적이고 피에르 보나르의 화집이 비닐 포장되어 있음에 한탄도 하고 좋아하는 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의 영문판도 보았다. 인상적이었던 책은 <Artists' Instagrams>이라는 노란색 책이었는데 제목 그대로다. 예술가가 인스타그램을 했다면 이런 피드와 해시태그를 달았을 거라는 상상을 선으로만 된 드로잉으로 그려 놓은 것. 글씨와 그림도 매력적이었고, 샤갈과 마티스, 보나르와 만 레이, 자코메티 등 화가와 사진가, 조각가 특유의 개성이 드러난 인스타그램 피드가 감탄을 자아냈다. 여전히 그림체가 생생한데 구입하지 않은 게 한스러울 정도다. (작가는 Jean-Philippe Delhomme이고 작가 또한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으니 구경하세요.)
프랑스 서적 코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소설은 영 못 읽겠고 그림책이 딱 -내 수준은 아니고 내 수준에도 읽기 어렵지만-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림책을 많이 들춰보았다. 고르고 고르다가 두 권을 골랐는데 하나는 그림책, 하나는 만화책이다. 들춰보다가 그림이 페이지마다 색다르고, 글밥도 꽤 많지만 메시지를 알 것 같은 책 <Demain entre tes mains>을 골랐다. Cyril Dion와 Pierre Rabhi의 작품인데, <내일>이라는 환경 관련 동화책의 시릴 디옹이라는 작가를 기억해서다. 어린이책이지만 넷플릭스에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도 있다. 한쪽씩만 읽어도 좋겠다 생각했는데 아직 못 펼쳤다... 고 쓰기 조금 창피해서 첫 장을 열었더니 그림은 모두 다른 작가들이 그린 건가 보다. 나는 시릴 디옹의 글 피에르 하비의 그림인 줄 알고 샀는데 두 분의 합작이로구나. 제목은 '당신들 손 안의 내일', 우리들에게 미래가 달렸다는 의미이다. 의미 있고 아름다운 책임은 분명하다. 그다음으로는 우리나라 작가의 만화 <Le chant de mon père(아버지의 노래)>를 골랐다. <지슬>,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준이오빠>를 그린 이 분이 프랑스와 관련 있을 줄은 몰랐는데 유학 가셔서 그곳에서 출간을 먼저 한 작품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책도 있고 그림도 이쁘고 한국 사람이라면 (프랑스어는 몰라도)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골랐다. 역시 교보문고가 좋구나 하면서.
이번 아티스트 데이트는 왠지 프랑스어 공부와 관련되어 뿌듯한 마음과는 별개로 약간 숙제 같은 기분이 들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내 시간을 채운 것 같아 만족스러웠다. 파리에서 가본 도서전의 기억이 떠오른다. 읽어내지 못하는 활자가 가득 찬 책들과 나는 알지 못하는 작가들로 가득한 공간에서 답답하기도 했지만 그곳의 활기만은 한껏 들이마셨다. 이 많은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는구나, 이 그림책은 무슨 얘길까 그림이 멋지다, 꽃 좋아하는 사람들은 도서전에도 꽃을 곳곳에 꽂아두었구나, 저 사람의 작품 세계는 독특하다 등등 나와의 대화(해외에서는 다들 혼잣말 많이 하시지요?)를 해나가며, 마음만큼은 활짝 피어났던 기억이 있다.
나의 아티스트 데이트는 여전히 책이 중심인 것 같다. 책 중에서도 특히 그림책은 여러 장의 예술 작품을 보는 것과 같아 펼칠 때마다 황홀한 기분을 선사한다. 이수지 작가님의 <여름이 온다>는 그림의 맛뿐만 아니라 음악 감상의 놀라움 또한 경험시켜주는데, 아직 모르신다면 유튜브에서 속히 감상하시기를.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을 흠뻑 흡수할 수 있다.
아티스트 데이트로 다양한 예술을 기웃거리며 접하고 싶다. 내 욕심으로는 두 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아티스트 데이트를 하고 싶지만, 또 그렇게 되면 내 마음은 뒷전으로 물러나 버릴 수 있으니 신중하게 기획하고 있다. 일단 대전국제음악제의 한 공연을 단 한 좌석(실제로 큰아이 학원 시간 하고도 안 맞고 이제는 아이들이 싫다고 할 것 같다) 예매해두었고, 이자람의 야외공연 날짜와 시간을 다이어리에 기록해두었다. 개학을 하고서도 일주일에 한 번쯤, 내 안의 어린 예술가를 위한 시간을 내고 싶다. 홀로 그러나 충만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