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의 음 소거된 마음 시리즈 - 고요 속의 외침
음 소거의 최고봉은 아무래도 시험 시간이다.
시험 감독을 하면서 안 그래도 예민한 나는 한껏 예민하게 아이들을 지켜본다. 부정행위를 찾겠다고 눈을 부라리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요구에 신속히 부응하기 위해서이다. 수정테이프를 요구하면 가져다준다. 답안지 교체를 원하면 잽싸게 바꿔 준다. 컴싸(컴퓨터용 사인펜)가 바닥으로 떨어지면 얼른 가서 허리를 굽히고 주워준다. 때로는 답안지나 시험지를 떨어트리는 아이도 있다. 누가 볼세라 재빨리 줍고는 아이의 책상 가운데에 놓아준다. 이렇게 다양한 요구에 부응하려면 아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대체로는 학생들의 정수리를 보게 된다. 시험지에 고개를 박고 문제를 풀다가도 얼굴을 들면 잽싸게 그쪽을 보고 그 아이의 얼굴을 살핀다. 자신의 요구 사항을 표하는 게 아니라면 나랑은 눈도 맞추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일방향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셈인데 이른바 페이크에 말린다고나 할까. 손을 드는 작은 움직임까지 포착하는 나는, 손을 번쩍 들고 머리를 긁는 아이에게로 시선을 주다가 다른 데로 눈을 돌린다. 굳어 있던 어깨를 펴기 위해 불쑥 팔 동작을 하기도 하고, 두피의 피지를 긁는 것인지 한참을 손가락이 머릿속을 헤집기도 하고, 갑자기 손을 쳐들고 가운데 가르마를 샤악 가르며 머리를 손질하는 남학생도 많다.
수학시간이었다. 응시하는 학생들보다는 못하겠지만 감독교사로서도 수학 과목은 긴장이 크다. 시간 내에 다 풀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게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제 수학 시간에 학생의 마음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도 한 학생이 문제를 풀다가 고개를 홱 올리길래 눈여겨보았는데 그러다가 보고 말았다. 음이 소거된 ‘시발’을! 학생은 나랑 눈도 맞추지 않았다. 그저 문제가 어렵다는, ‘개’ 어렵다는 어필이었을 게다. 그곳에서 아이의 욕을 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모두가 앞을 향해 앉아있는데 나는 정면에서 예민한 촉수로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아이의 입모양은 마치 3학년 국어 음운을 공부하는 시간에 내가 발음하는 입모양 같았다.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를 한 채로 음운을 가르치다가 언제는 마스크를 내리고 설명한 적도 있는, 국어의 음운. 소리가 날 때 입 모양이 어떤지 혀의 높이가 어떤지를 배웠던, 모음과 자음을 발음하는 내 입처럼 아주 분명하게 욕을 내뱉었는데 소리는 없었고, 중간에 모음을 길게 발음해 음절은 3음절 같았다. 마지막 모음이 하필 ‘ㅏ’였기에 턱을 아래까지 내리고 입을 크게 벌려서 종성인 ’ㄹ‘까지 분명히 보여주는, 소리 없는 발성, 고요 속의 외침, 아니 아이의 절규가 그야말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역시 중학생은 음 소거에 탁월하다는 내 주장에 결정적인 근거가 되어주었다고 기뻐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당황하다가 그렇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남은 시간 감독을 했다.
그러고 보니 바로 전 시간에도 나는 그 단어를 다른 반 아이의 시험지에서 읽었다. 맨 앞에 앉은 학생의 시험지를 흘긋 보게 되었을 때였다. 나 보라고 써놓은 건 아니겠지만 나는 좀 놀랐다. 너무도 큰 글씨로 ‘@@(과목명) 시험은 왜 보는 거야 시발!’이라고 써둔 것이다. 시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조용히 시험을 본다고 해서 그 내면까지 조용한 건 아니었다. 부글부글한 마음을 때로는 보이는 글자로, 때로는 들리지 않는 입모양으로 그들은 내뱉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험 시간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번 기말고사 아침마다 자습시간이 있어서 나로서는 좋았다. 우리 반에서의 자습시간과 1교시의 자습시간이면 책 한 권을 얼추 읽어낼 수 있어서 그 고요함을 즐겼더랬다. 학생들 입장에서는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겠지. 자리에 꼼짝없이 앉아서 되풀이하는 공부. 시간을 잘 활용하라고, 집중력을 발휘하자고, 조그만 더 힘을 내자고 다독였어도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다. 방과 후 아이들을 보내고 남은 몇 명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아이의 시험지에 쓰여있는 무서운 단어를 보았다. 밝은 창가 앞에 서있는 아이의 시험지가 그대로 투과되어 보였는데, 컴싸로 굵게 ‘자살!‘이라 써두었던 것이다. 내가 잘못 보았기를, 가로가 반대로 되어 ’살자’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우리 중학생들이 하루하루 시험을 보고 나면 급식실에 줄을 서서 내게 건네던 말을 알기 때문이다.
“선생님, 오늘 저 망했어요.”
“오늘 저 집에 못 들어갈 것 같아요.”
“선생님, 저 아무래도 뛰어내려야겠어요.”
여러 번 들어도 적응할 수 없는 말이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고, 괜찮다고,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건넨 말이 위로가 되었을까. 성적이 뭐라고 이렇게 애 태우는지. 나를 구성하는 여러 가지 부분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대범하게 넘겼으면 좋겠다. 힘껏 욕을 하면서라도.
정혜윤 작가의 <뜻밖의 좋은 일>을 읽다가 밑줄 그어둔 부분이 있다. 자꾸 발음하고 싶은 문장이었다.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커트 보니것의 졸업식 연설문 모음집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알렉스 삼촌이 한여름 사과나무 아래서 레모네이드를 마실 때 외쳤다고, 행복할 때 행복의 순간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말로 나온다. 결국 우리 삶은 이런 순간들을 오래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누리는 일일 터. 사소한 일상의 기쁨을 발견하는 게 삶의 지혜가 아닐까. 이 말을 마음에 품고, 소리 내어 말하는 마음에는 삶이 고되고 슬퍼도 끝내 삶의 즐거움을 찾아내겠다는, 아니 찾아야 한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들을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다. 다음 주 월요일에 우리 반은 제비 뽑기로 순서를 정해 그 순서대로 자리우선권을 받기로 했다. 좋게 말하면 그런 거고 거칠게 말하면 마음대로 앉아보겠다 이거다. 방학까지 남은 일자는 7일! 학교에서는 꿈 끼 탐색주간이라고 다양한 활동을 준비했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도란도란 수군수군하는 일주일의 학교생활이, 내 귀에는 조금 거슬리겠지만 그들이 속내를 드러내기에는 안성맞춤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아이들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으면,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써놓고 보니 입에 맛나고 시원한 거라도 물려주어야 할 수 있는 말 같다. 아이스크림을 쏴야겠다.
+우와, 우리 반 부반장이 선거 공약이었던 마니또 이벤트를 제안했다.
@정혜윤, <뜻밖의 좋은 일>, 창비
@사진은 수신지,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1>, 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