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장녀로 살기, 이제는 어떤 엄마로 살 것인가
언니가 있었으면 싶었고 뭔가를 맨 처음 겪어내는 일이 버거웠다. 남동생 있는 누나로서 한 번쯤은 꼭 겪었을, 엄마가 동생만 예뻐한다는 생각으로 어린 시절엔 괴로웠고 다정한 보살핌이 고팠다. 이제와 돌아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는데 결핍을 느꼈다는 건 내 성정이 예민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느꼈을 시집살이의 고단함이나 외로움 등을 내가 잘 알아차려서 그랬을 수도 있다.
친구가 자기 엄마를 ‘ㅇㅇ씨’라 부르는 걸 보고 유난이라 생각하며 반발심까지 들었는데 ‘엄마‘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을까. 이제는 알겠다, 엄마 인생 자체에 대한 생각 없었음을. 이름이 있는 한 사람이기 이전부터 엄마는 엄마라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거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야 엄마의 하루가 궁금해졌던 것 같다. 우리가 다 학교 가고 나면 엄마는 뭘 할까. 자꾸만 엄마를 불러내 둘이서 쇼핑도 하고 데이트도 하는 나날을 보냈다.
결혼을 하고도 친정에서 살거나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 집 살림에 엄마 의견이 담겼다. 아이를 낳고는 육아에 큰 지분을 담당해 주셔서 더 그렇게 되었다. 몸이 편함과 동시에 마음에는 불편함이 자라났다. 엄마 정체성이 더해지자 엄마의 간섭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치유의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를 나로 되살리기 위해 조리원에서부터 모닝페이지를 쓰고 책을 읽고 내 시간을 사수하고자 했다.
대전으로 이사 오고 육아독립을 하면서 가족 모두가 휘청였다. 일곱 살, 네 살 아들의 등하원을 남편과 분담하고 어찌어찌 살림을 했다. 그때가 남편하고 가장 많이 부딪쳤던 때다. 주말부부로 지내다가 합쳤으니 그럴 만도 하다. 육아휴직을 하고 그렇게 독립하는 듯싶다가 복직과 동시에 엄마를 주중에 대전으로 모셨다.
살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홀가분함과 동시에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는 은근한 압박이 생겼다. 월요일 오후는 내겐 지루한 시간이 되었다. 주말 동안 아빠와 있었던 일이나 엄마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퇴근하자마자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훈훈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 듣는 내 얼굴을 무표정이었을 거다. 왜 이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할까, 남동생한테는 이렇게 안 하면서. 감정의 쓰레기통이라는 단어를 종종 떠올리곤 했다.
파리에서 일 년을 지내면서 물리적인 거리와 함께 정서적인 거리감도 지켰다. 엄마 아빠도 두 분의 생활에 질서가 잡혀갔다. 하지만 돌아오고서도 엄마를 모셔왔고 코로나 덕에 우리 집 살림은 다시 엄마 차지가 되었다. 월요일 오후는 으레 엄마 하소연 듣는 날.
내 출퇴근길이 단축되고 아들들이 커가면서 더 이상 할머니 손길이 간절해지지 않았다. 이제야 이루어진 독립. 손자들도 자기만의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컸기 때문이었지만 이 독립이 저절로 된 건 아니다. 엄마도 나도 각자 노력했다.
대학 때 우리 학교로 파견 나오신 국어교육과 교수님이 해주신 말씀이 아직도 생각난다. 지나가는 얘기였는지 아님 쓰기 교육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당신은 친정어머니와 편지를 주고받는다고. (내가 벌써 사십 대이긴 하지만, 그때도 휴대전화는 있었다.) 그냥 안부를 전하는 편지가 아니었다. 교수님께서 어떤 질문이나 과제 같은 걸 주시면, 그에 대해 어머니가 생각하고 쓰는 편지였던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쓰는 에세이로 일종의 치유하는 글쓰기였던 셈. 아직도 잊히지 않는 것은, 내가 쓰기에 관심이 있기도 하거니와 우리 엄마에게도 저런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시간이 흐르면서 간간이 했기 때문이리라.
치유의 글쓰기 책을 많이 읽어서인지, 둘째 낳고 학교에서 집단상담을 받았던 효과였는지, 심리 분석이라든가 무의식과 꿈 이런 것은 늘 나에게 의미 있는 주제였다. 나는 한 번씩 엄마에게 말로 혹은 편지로 내 입장을 표명했다. 어린 시절 내가 느꼈던 서러움을 알렸다. 엄마가 아빠에 대해 안 좋게 얘기하는 걸 들을 때마다, 내게도 있는 아빠의 모습이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말했다. 한 사람으로서의 엄마 인생을 내가 다시 그려보며 ㅇㅇㅇ씨 살아내느라 수고가 많다고 위로하는 편지를 썼다. 그걸 썼을 때에는 솔직히 내 마음이 다 괜찮아진 게 아니었는데 그런 척 쓰고 나니 나아진 기분이었다. 엄마가 그 편지를 읽고 눈물이 났다고 했던가, 내 편지에 대해 카톡인가로 답해주었을 때 조금은 응어리가 풀린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내가 같잖게 여겨지기도 했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난 척하는 글 따위를 썼을까. 엄마는 딸한테 이렇게 평가받는다는 기분에 짜증나진 않았을까. 중학생 때부터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서 엄마한테 선물했던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한테 이 책 읽어보라고 드린다. (정작 나는 남이 선물한 책을 잘 못 읽는다.) 그럼 엄마는 또 그걸 읽는다. 그렇게 엄마가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걸 알았다. 내 말이 엄마에게로 가 생각하는 기회를 드렸을 것이고 책이 엄마의 세계를 넓혔을 것이다. 이 성장에도 분명 성장통은 있었다. 엄마도 첫째인 나를 키우는 게 처음이었을 것이고, 나도 나름대로 순종적으로 지내왔지만 첫째이기에 어떻게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건지는 몰랐던 것이다. 아들이 둘이라서 안 됐다는 말은 아직도 듣는 말인데, 내 내면을 다잡느라 애쓰던 마음을 생각하면, 우리 아이들이 딸이 아님이 다행스럽다. 상처 주는지 모르는 채로 주는 상처가 많았을 것이며 그 상처를 들여다보느라 딸은 딸대로 힘들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친가 식구들이 엄마에게 함부로 하는 걸 지켜보면서 내 어딘가도 부스러졌던 것 같다. 딸이기에 엄마와 동일시하면서 엄마의 우울감이나 낮은 자존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녀 관계가 더 복잡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너무 우월한 척했던 건 아닌가 했던 죄책감은 최근에 사라졌다. 벌써 고등학생인 큰아들은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으로 자료를 찾고, 몇 쪽짜리 보고서를 써내고, 나는 엄두도 못 내는 두툼한 책을 읽어낸다. 그 아이가 나더러 그걸 읽으라든가 이런 것도 좀 해봐라 하면 나는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딸이 하란대로 따라온 엄마에게 새삼 고마워지는 것이다. 또한 아들에게 그래 너 잘났다 이런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고, 그저 아이가 기특하고 대견하고 언제 저렇게 컸을까 뿌듯한 마음뿐. 그렇다면 우리 엄마도 그렇겠지. (아빠한테도 나는 아빠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하는 듯한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부모님이 노력하는 모습 덕분에 나도 모나지 않게 자란 듯하다.
우리 가족이 안정되어 보인다면 이런 지난한 시절 덕분이리라. 지금의 관계는 적당한 거리감으로 건강한 편.(내 일방적인 생각일 수도 있다, 엄마로서는 더 가까워지고 싶을 것이다.) 반찬을 한가득 해오시고 우리 집을 반짝이게 정리해 주시면 이제 나는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산뜻해질 수 있다는 걸 몰랐다. 모녀 관계는 언제나 질척이고 어느 부분은 곪아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현재는 호시절을 지나고 있다. 점점 더 약해질 부모님께 나는 더 단단하고 넓은 품을 준비해 두어야지.
서로의 노력과 거리 덕분에 자연스럽게 자식의 위치는 낮은 자리가 아닌 동등한 쪽으로 옮겨간다. 어린 자녀가 어른 부모에게 받은 상처는 그렇게 서로를 존중하면서 치유된다. 이렇게 부모의 마음은 자식과 더불어 자라나는 듯싶다. 어른이 되고도 그렇다. 딸이기도 하지만 엄마이기도 한 나는 이제 어머니로서의 나의 입장을 단속해야 할 때를 맞이했다. 모자 서사가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일단 나부터 행복해야 할 것 같고, 우리 부모님이 보여준 대로 아들들의 의견을 존중하며 살아야겠다. 어떤 방향으로 살아야 하는지 늘 깨어있기를. 글쓰기가 내게 그 도구가 되어줄 것이다.
앗, 나에게도 어머니로서의 모녀 관계가 있잖아. 우리 고양이 겨울이는 내 딸. 잊지 않으려고 제목 사진에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