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방 한구석에는 공테이프가 가득 담긴 작은 바구니가 있었다. (혹시 '카세트테이프'가 뭔지 모르신다면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스타로드가 음악을 들을 때 쓰는 그것'입니다. 학생들한테 이렇게 설명해야 알더라고요.) 라디오에서 우연히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손이 번개처럼 움직여 녹음 버튼을 눌렀다. 노래 앞부분이 잘리거나 DJ 멘트가 겹쳐 들어간 채로 녹음된 테이프를 수십 번 돌려 들으면서, 마치 그 음악의 소유자가 된 것처럼 뿌듯해하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행동이 저작권을 슬쩍 넘은 것이었다는 걸.
조금 더 컸을 땐, 정식 출간되지 않은 일본 만화책 해적판을 손에 넣는 일이 나름의 문화생활이었다. 동네 구멍가게 뒤편, 만화책 코너에서 얇고 흐릿한 복사본을 골라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인쇄 상태는 엉망이었고, 번역도 엉뚱했지만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 준 위로와 상상력은 컸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설렘은 누군가의 권리를 무시한 대가 위에 있었던 셈이다.
조금 더 자라면서 저작권에 대한 의식은 싹텄지만 여전히 구멍투성이었다. 친구들이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내오면 그것을 캡처해서 사용하기도 했고, 웹툰을 보다가 웃긴 장면을 캡처해 SNS에 올리거나 스마트폰 배경화면으로 설정하며 나만의 감성이라고 착각했다. (물론, 요즘은 웬만한 웹툰 플랫폼에서는 스크린 캡처를 막아놓았다.)
올해 3월, 웹툰 업계가 불법 웹툰 공유 사이트 '오케이툰' 운영자의 엄벌을 촉구하며 탄원서를 제출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기안 84를 포함한 수많은 작가의 작품이 허락 없이 유통되었고, 그 피해액이 무려 500억 원에 달한다고 했다. 내가 과거에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이 결국 이런 문제와 닿아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창작자의 권리를 빼앗는 일은 단지 법을 어기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시간과 열정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도 하니까.
교사가 된 지금은 저작권을 더 이상 내 ‘개인적인 반성’으로만 여길 수 없다. 요즘 학교는 기말고사 출제 시즌이다. 대부분의 시험지에는 마지막 장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인쇄된다.
“이 시험문제의 저작권은 ○○○학교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전재와 복제는 금지되며, 이를 어길 시 저작권법에 의거 처벌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근처 학원에서는 그 시험지를 복사하고, 몇 년치 기출을 모아 수업 자료로 활용한다.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시험문제 모음집을 푸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잠시 멈칫하게 된다. 공교육 자료라는 이유로 저작권 보호의 예외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 시험도 누군가의 머리와 시간을 들여 만든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학교 홈페이지에 문서를 올릴 때도 저작권은 늘 고려 대상이다. 사용한 글씨체가 무료인지, 배포 가능한지 꼼꼼히 확인하고 의심스러우면 아예 바꾼다. '이거 예쁘다!' 싶었던 폰트가 공문서에 사용 불가라는 걸 알고 부랴부랴 수정한 적도 있다. 수업 시간에는 학생들에게 이미지 자료를 찾게 할 때마다 “출처 밝혔니?”라는 말을 습관처럼 던진다. 학생들은 “선생님, 다들 그냥 쓰는데요?”라고 말하지만, 그 '다들 그냥 쓰는 행동'을 한 번 더 고민하도록 바로잡아 주는 것도 수업 중 다뤄져야 할 부분일 것이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학생들은 ChatGPT의 도움을 받거나, 이미지 생성 툴을 활용하여 포스터나 카드뉴스 같은 결과물을 뚝딱 만든다. 그런데 그 결과물에 어떤 데이터가 사용됐는지, 누구의 창작물이 흘러들어 갔는지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에게 던지는 “이건 누구의 결과물일까?” “허락받은 사용일까?”라는 질문 하나가, 나의 과거를 반추하고 현재의 교육을 조금씩 바꾸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저작권은 단순한 법 조항이 아니다. 그것은 창작자에 대한 예의이고, 내가 만든 것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내가 어릴 때 저질렀던 행동은 나름의 '시대적 무지'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이들에게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게 만들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내 추억은 여전히 따뜻하지만 그 따뜻함 뒤에 차가운 책임을 함께 기억해야겠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저작권을 ‘막연히 지켜야 할 법’이 아니라, ‘누군가를 배려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이면 좋겠다. 결국 더 건강한 창작 생태계는 그렇게, 아주 작은 이해와 존중에서 출발하고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올 테니까.
* 표지 사진은 마이크로소프트 윈도우즈의 기본 배경화면으로 유명한 ‘Bliss’(행복)라는 이름의 이미지다.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작가 찰스 오리어가 촬영한 이 사진은 단 한 장으로 약 1,000만 달러(약 7천억 원)의 저작권료를 벌어들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저작권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