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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가 105,000원짜리 샴푸를 사기란.

나만 쓰는 비싼 물건이 담긴 영수증을 보며

by 주연

아침에 머리를 감으려 고개를 깊이 숙이고 샴푸통에서 펌프를 누르다가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 흘깃 보니 어느덧 바닥을 보이는 샴푸통이 눈에 띈다. 생각해 보니 샴푸를 구입한 지 꽤 된 것 같다. 이제 새 샴푸를 사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하며 망설여진다. 망설여지는 이유는 지금 쓰고 있는 샴푸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부쩍 머리숱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뿌리 펌을 하거나 드라이로 힘껏 열을 주어 감추고 있을 뿐 정수리의 머리숱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어 얼굴이 더 부어 보이기도 하고 또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었다. 나이는 줄어드는 일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은 자연의 섭리일 텐데도 갑작스러운 외면의 변화는 최대한 늦추고 싶었던 걸까. 거울을 볼 때마다 줄어든 머리숱만이 눈에 띄던 시절이 있었다.


더 이상 머리숱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두피에 좋다고 해서 괄사로 마사지를 해보기도 하고 빗으로 두피를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그때뿐일 뿐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다 천연 샴푸를 사용하면 훨씬 도움이 된다는 주변 지인들의 추천을 받아 큰 맘을 먹고 샴푸를 바꿔봤다. 큰 맘을 먹은 이유는 기존에 사용하던 샴푸보다 꽤 비쌌기 때문이다. 식물성 재료를 사용해서인지 아니면 비건주의라는 브랜드 가치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브랜드 값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기존에 마트에서 구입해서 사용했던 같은 용량의 샴푸보다 무려 5배나 비쌌다.


그리고 그 가치를 입증이라도 한 듯이 그 샴푸를 꾸준하게 쓴 지 3-4개월이 되자 모발이 좀 더 힘이 있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또 뿌리가 단단해지는 건지 뿌리 볼륨도 살아나는 듯했다. 여전히 많은 머리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요즘은 갑작스럽게 찍힌 사진에서도 정수리가 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격이 비싼 대신 용량이 무려 1리터나 되어 욕실을 혼자 사용하는 내 경우 샴푸를 다 사용하는데 기간이 꽤 걸리기도 해서 가치 있는 소비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그 샴푸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저녁에 사면 새벽에 배송을 해주는 배달시스템을 누리고 있지만 쉽게 결재버튼이 눌러지지 않는 것은 머리숱의 고민이 다소 해결된 이 시점에서 너무 사치스러운 소비는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월급은 크게 오르지 않았는데 장바구니 물가도 오르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육비의 인상폭도 커지는 요즘이었다. 생활비를 잘 아껴 조금씩 돈을 저금해 여행비용에 보태기도 했는데 요즘은 저금은커녕 한 달 분의 생활비로 생활하기에도 빠듯했다. 그래서 옷이나 신발 등 사고 싶은 품목들이 장바구니에 있지만 담아만 둘 뿐 쉽게 결재를 하지 않던 요즘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침 샴푸가 똑 떨어진 것이다. 어떤 게 합리적인 소비일까. 생활비의 측면에서는 당연히 마트표 대용량 샴푸를 사는 것이 맞지만, 그것 또한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이런 내 고민을 안 걸까? 어제까지 안 보이던 할인 쿠폰이 두 장이나 보인다. 십오 프로에 추가 십 프로면 정가보다 이만 원 이상 할인되는 것이니 고민의 무게도 그만큼 내려간다. 장바구니에 담긴 다른 생필품과 함께 결재 버튼을 눌렀다.


다음날 새벽 장바구니에 있던 품목들이 상자에 담겨 우리 집 현관 앞으로 배송되었다. 아이들이 즐겨 먹는 빵과 파스타 소스, 주말 한 끼를 책임져줄 쌀국수의 밀키트, 고기와 계란 등 구입한 품목의 영수증을 보니 모두 가족을 위한 소비다. 딱 하나 내 샴푸가 나만을 위한 소비인데, 머리숱을 보며 스트레스받지 않고 일상의 다른 순간들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 정도쯤은 과소비가 아닌 거 같기도 하다. 배송 온 상품들을 냉장고에 넣고 화장실에 넣어두니 오늘 하루 시작이 나쁘지 않다. 샴푸가 비싸서 고민하다가 샀다고 하면 가족 모두 그냥 사라고 다른 데서 아끼자고 했을 텐데 너무 고민했나 싶다가도 늘어나는 생활비에 뭐라도 줄여봐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너무 당연한 거 같기도 하다.


앞으로도 내 월급이 크게 오르고 ,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돈이 크게 늘지 않는 이상 장바구니에 여러 품목을 넣었다가 뺐다가 하며 결재 전, 구매 리스트에서 삭제하는 등의 망설임은 계속될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한 소비나 가족을 위한 물품 구매에는 고민이 크지 않은데 내 물건을 사는 것은 왜 이기적인 것처럼 느껴지는가.(그럼에도 많이 사긴 하지만,,,) 평소 가족을 위해 애쓰며 생활하는 나이니, 생활비를 줄이기 위한 망설임 중간중간에는 나를 위한 이기적인 소비도 가끔은 봐주자. 망설임 끝에 새로 산 샴푸하나가 오히려 생활비를 줄이려 노력하는 나를 치하해 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지나친 합리화일까? 하지만 나를 위해주는 느낌이 들어 조금 더 행복해진 것 같으니 때때로 이런 합리화를 계속해보기로 한다. 하. 생활비야 부디 안녕해줘.

(@표지사진은 지난 스페인 여행 중 톨레도에서 찍은 내 뒷모습. 머리가 풍성하게 느껴져 더욱 맘에 들었던 사진이다. 물론 샴푸 때문은 아니겠지만, 샴푸 영향도 있지 않을까요,,,,?)


친구들과 만나 소품샵에서 내 여름용 잠옷과 양말을 샀다. 내꺼 너무 많이 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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