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처럼 흐르는 인생

내 인생의 한 시절이 지나고, 다시 오고

by 조이아

1. 호의 덕분에 떠올린 파리 생각

마음의 실타래가 풀린 건 빵 가게 주인의 덤 덕분이었다.

"바게트는 따로 안 파세요?"

주문한 소금빵 포장을 기다리며 건넨 말이었다. 진열장이 아닌 안쪽 테이블 위에 놓인 바게트 몇 개를 보며 물었다.

"준비가 덜 되어서요."

"아아, 지난번에 바게트 샌드위치가 맛있어서요."

빵을 받으려고 보니 어느새 종이로 둘둘 말린 바게트를 내 빵 봉투에 담아주시는 게 아닌가?

"만들어 본 건데 맛보세요."

"어머, 감사합니다."

또 오겠다며 기분 좋게 빵집을 나왔다. 삐죽 삐져나온 바게트라니. 손에 쥘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얼마만의 바게트인가.


중고딩 아들 둘의 짜증과 무기력이 포자처럼 흩날려 남편과 나온 길이었다. 너무 답답하다, 쟤는 왜 저럴까 주거니 받거니 하며 카페로 향했다. 아들들에게 받은 부정적 포스를 서로에게 안전하게 쏟아냈다. 역정으로 시작했지만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천변이 보이는 카페에 앉아 하늘, 나무, 새, 사람들, 강아지를 구경하려니 남편이

"여길 세느강이라고 생각해."

하는 거다. 그게 말이 돼? 어떻게 반석천이 세느강이 되냐며, 나는 또 투덜댔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카페 옆 가게 빵집에서 소금빵을 사 오는 길에 나는 느꼈던 것이다. 무엇을? 파리에서의 감각을! 무엇 때문에? 내 손에 쥔 바게트 덕분에.

파리의 빵집에서 바게트를 사올 때면 집까지 오는 길- 아무리 짧아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라도-에 그 꽁다리를 떼어먹게 되었다. 겉은 딱딱하고 안은 부드러우며 이루 말할 수 없이 고소하게 퍼지는 맛. 고작 1년 살았더래도 그 찰나가 그립다, 무척. 겉을 두드리면 팅팅 소리가 나던 바게트. 크루아상은 얼추 비슷한 맛이 있다 하더라도, 요상하게 그 바게트의 맛을 찾기란 어려워 빵집에 갈 때면 바게트는 쳐다보기만 하고 사진 않았다. 그런데 선뜻 내게 건네진 바게트라니. 천변을 배경으로 바게트 사진을 찍고, 어쩔 수 없이 바게트의 끄트머리를 한 입 떼어먹었다. 파리에서의 그 맛은 아니었지만 '응, 바게트구나' 싶은 맛이었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게 참 별게 아니다 싶으면서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2. 변화가 필요해

저녁에 50분 정도 혼자 산책을 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이 걸음마다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아들들에 대한 부아나 실망은 걸음걸음 버리고, 그저 나에 대해서만 생각하기로 했다. 다음 주에 해야 할 일들도 생각나고, 이제 가을이구나, 긴팔 옷을 더 꺼낼까, 나는 겉모습도 중요한 사람이구나, 긴 머리는 정말 나랑 안 어울리는데 억지로 데리고 있었네, 이제 됐어. 그렇게 2년 여 겨우 길러온 머리를 짧게 치고 싶다는 결심을 했다. 집에 오자마자 옛 사진을 더듬으며 내 스타일을 확인했다. 미용실 예약을 하고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결심의 계기가 뭘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낮에 그 바게트 탓이었던 것 같다. 파리 시절의 내가 그리우면서 그때 그 머리모양 - 숏컷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게 아닐까.

오늘 오후, 막상 자르고 보니 예상과 달랐지만(여름에 했던 매직펌이ㅠㅠ) 기분 전환은 됐다. 원장님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느냐 물었는데, 글쎄요. 원장님은 가을이라서 그렇죠, 받았지만 내 젊은 날을 회복하고 싶어서 그랬다는 걸 나는 안다.



3. 아직 알 수 없는 나

오늘 아침엔 KBS 라디오 '작은 서점 - 장강명의 인생책' 인터뷰를 보았다. <미생>, <파인>의 윤태호 작가님 인생책 얘기를 듣다가 귀에 꽂힌 말이 있다. 당신은 젊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려워 인물을 그리기 주저했는데, 헤르만 헤세는 어쩜 이렇게 청춘에 대한 작품을 계속 써왔을까 생각하다가 이런 생각을 하셨단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 말고 내가 모르는 내가 아직 더 있을 거라 믿는 게 청춘이라면, 나이가 몇이건 청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라도 그 시절에 대해 발화할 수 있는 게 아니냐. 젊은이들을 염탐하듯 보고 따라 하는 게 아니라 인류애를 가진 창작자로서 인생의 흐름에 있어, 어느 시기라도 쓸 수 있는 거라고 말이다. 창작자로서 어떤 시기든 쓸 수 있다는 얘기는 차치하고라도 '청춘'에 대한 작가님 말씀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나 말고 내가 모르는 내가 아직 더 있을 거라 믿는' 마음이 청춘이라니. 나는 그 마음을 가지고 살고 싶다.

아직 모르는 나를 찾기 위해 일단은 머리칼을 잘랐는데, 그거 말고 어제오늘 한 일은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를 읽는 일이었다. 내 무의식을 알고 싶어서. 저자로 살고 싶어 독립출판물을 만들었으면서도(그것도 세 권이나) 막상 입고 요청도 주저하고, 투고는 겁나서 하지도 못하는 나란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메일을 보낸다 한들 거절 또는 무반응이 최악의 반응일 텐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글쓰기 실력이 형편없다는 피드백일까, 이런 내가 어떻게 책을 만들었지? 과거의 나여, 어떤 용기로 그랬니? 아들들과 알콩달콩 지내고 싶으면서도 내 표정으로 입으로, 걱정과 불안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내 무의식이 하는 일일 거다. 그런 생각들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긴 하지만 또 어떤 마음이 있는지 궁금해 책을 읽는다. (남편이 놀랐다, 이런 책을 네가 왜 읽느냐며. 예상과 다르게 과학적 사례가 너무 많이 나온다. 나는 그저 내가 궁금할 뿐인데.) 어쨌든 모르는 내가 아직 남아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이 책이겠지.

@ 데이비드 이글먼, 김승욱 옮김, <무의식은 어떻게 나를 설계하는가>, RHK


4. 나는 다시 청춘, 하고 싶다

아직 알 수 없는 내가 있다는 건 두렵기도 하지만 설레는 일이기도 하다. 바게트 하나로 파리 시절을 떠올리고,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해 긴 글로 마음부터 다잡는다. 긴 연휴가 가을방학처럼 느껴져 너무 좋지만 별로이기도 한 게 또 내 마음이다. 넷이 똘똘 뭉치는 일을 만들기는 쉽지가 않고, 각자 자신의 일을 하는 것으로, 자기 즐거움을 찾는 것으로 변한 가족 문화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인생의 한 시기가 이렇게 흘러가는가 싶다. 한 번씩 스마트폰 사진첩에 '과거의 오늘'이 뜰 때면 파리 시절 우리 아들들은 내 양손을 붙잡고 다니던, 잘 웃던 어린이들이었는데. 과거 사진을 보다가 다시 깨닫는 게 있다. 파리에서 숏컷으로 잘랐을 때에도 내 머리는 완전 남자아이머리였구나(오늘 커트하고 완전 실망했다), 그때도 매직펌이 남았었으니. 인생의 한 시기가 저물고 그다음 시기를 맞이하는 일이 이렇게 보니 종이를 접은 듯이 맞닿는 데가 있나 보다. 그렇다면 파리에서의 1년이 내 인생의 전환점(쓰기를 실행하던!)이었으니, 다시 올 전환기의 파도를 힘차게 타보겠다. 아직 모르는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싶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청춘, 하련다. 어쩌면 파리에 다녀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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