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안 써지는데, 남편은 잘 잔다
두 아이를 재우고, 어제 달리기 후유증으로 뻐근한 다리를 폼 롤러로 풀어주고, 침대에 누워 눈밑지방 재배치 후기를 한참이나 뒤지다가, 거실에 나와 웹툰까지 잠깐 보니 자정이 훌쩍 다가왔다. -이미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이지만- 이대로 하루를 마무리하기에는 죄책감이 들어서, '자기 전에 브런치에 글 한 편 올려야지.'하고 하얀 화면을 마주한 지 한 시간쯤 됐다.
아... 내가 웹툰을 볼 때쯤 시작된 저 소리, 지금도 들린다.
'쿠워어어어어- 푸후우-- 크르르르-'
밤늦게까지 사부작거리는 내가 매일같이 듣게 되는, 남편의 목과 코가 협연하는 수면 협주곡이 오늘도 빠짐없이 찾아왔다. 문제는 내가 지금 뭔가를 쓰고 싶다는 거고, 머릿속이 텅 비어서 어떤 주제를 끄집어내야 할지 헤매고 있다는 거고, 집 안 어디를 가도 벗어날 수 없는 백색소음에 갇혀 깜박이는 커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는 이 소리가 너무 힘들어서 잠든 남편을 콕콕 찌르거나 툭툭 쳐서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제는 그럴 기운도 없다. 어차피 잠시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작된다. 게다가 피곤해서 쓰러지듯 잠든 남편을 보면 마음이 약해진다. 직장 생활하면서 아이들도 챙기고 집안일도 운동도 열심히 하는 사람의 코골이는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냈다는 증거'라는, 매우 F스러운 새벽 감성이 올라온다. (T의 마음으로 코골이 치료나 코골이 방지 테이프 등을 검색한 적도 물론 아주 많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코 고는 소리를 막아보려고 무선 이어폰을 가져왔다. 가사가 없고 마음에 드는 음악을 찾는데 또 십 분여를 허비했다. 진짜 이상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았는데, 막상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다니는 것 같은데 하나도 건져 올릴 수가 없다. 맨손으로 미꾸라지 잡는 게 이런 기분일까. 아이들 이야기, 오늘 저녁에 봤던 서바이벌 프로그램, 어제 완독 한 소설, 끝나가는 연휴에 대한 아쉬움... 다 글감으로 충분해 보이는데 몇 문장 뽑아내고 나면 한 편의 글로 늘려보기엔 너무 얇고 납작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남편은 대단하다. 자면서도 아주 꾸준하고 거침없이 분명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글은 안 써지는데, 저 코 고는 소리는 수능금지곡마냥 귀에 박혀있다. 이 코골이 리듬에 맞춰서 뭔가를 적어보면 어떨까. 쿠어어어- 들숨에서는 그럴듯한 비유 하나, 푸후우- 내쉬는 숨에서는 의미심장한 단어 하나, 크르르르- 목구멍을 긁는 소리에서 딱 마침표. 그렇게 뭔가 문장이 하나씩 완성되면 좋겠다. 현실은 앞으로 나가는 마침표가 아니라 뒤로 뒤로 백스페이스만 계속 누르고 있다.
이쯤에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가끔 코를 곤다. 아주 피곤한 날에는 그런 모양이다. 안 그런 줄 알았다. 얼마 전 남편이 녹음한 걸 들려줬는데,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남편은 또 그걸 굳이 카톡으로 보내줬는데, '아내의 귀여운 코 고는 소리'라는 파일명이 무색하게 소리는 거의 공항 활주로였다. 그날 이후, 기존에 갖고 있던 '코 고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는 마음에 '나도 나이 드니 별 수 없다'는 동지애가 더해져 내 잠을 빼앗는 코골이에 대한 원망을 조용히 접어두기로 했다.
가만 보면 부부라는 건 이런 건가 보다. 한 사람은 글을 쓰겠다고 새벽까지 불을 켜고 있고, 한 사람은 코를 골며 하루치 삶의 피로를 내뱉고 있고, 그렇게 서로가 안겨주는 불편함을 안쓰럽게 묵인해 주는 것. 서로 민낯을 보는 시간이 쌓여가고, 우리는 둘 다 피곤한 중년이고, 둘 다 코를 곤다. 별 수 없다.
글이 써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과 남편의 코골이에 대한 자포자기 심정을 더했더니 어느새 화면 오른편 스크롤이 꽤 아래쪽으로 내려와 있다. 계속되는 코 고는 소리, 나의 푸념, 깊은 밤을 비추는 조용한 조명. 잘 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열심히 썼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실패를 마주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자주 하는 말을 슬쩍 내밀어 본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 오늘 나는 내내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했고, 소음공해 속에서도 글 한편을 마무리해가고 있다.
생각해 보니 이것이 남편을 비중 있게 다룬 첫 글이다. 글쓰기 동료인 주&희 두 언니가 남편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쓸 때도, 그리고 나에게도 남편에 대한 글을 써보라고 권할 때도 그저 웃으며 버텼는데 이렇게 대대적으로 코 고는 사람으로 홍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다음엔 좀 더 예쁜 이야기에 등장시켜야겠다.
... 그런데 뭐, 사는 게 원래 그런 것 같다. 나이 들면서 안 골던 코도 골고, 대박 아이디어라고 시작했던 글이 세 문장만에 끝나기도 하고, 별 주제 없이 쓰다 보니 또 글 한편이 나오고. 이것도 우리 사이의, 나름의 아름다움이려니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