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의 멸종>을 우려하며
독서모임에서 2박 3일 여행으로 경주엘 다녀왔다. 50대~30대 여성 여섯 명이 함께 했고 계획한 것은 딱 하나, 미술관 가기. 출발 이틀 전에 원데이 요가 체험을 덧붙였다. 여행지에서 요가하기는 제주도에서 한번 해봤는데 그 기분이 무척 좋아서 추진했다. 요가와 안 친한 분들도 계셔서 진땀을 뺐지만 함께 새로운 경험을 했다는 점에서 만족스러웠다.
솔거미술관, 오아르미술관은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유현준 교수가 설계한 오아르미술관은 능뷰가 보이는 통창을 자랑하며 루프탑에서 보는 경관이 근사했다. 미술관에서 인증샷을 찍다가 <경험의 멸종>을 떠올렸다. 책에서는 요즘의 현실은 '개인'이 아니라 '사용자'로서 살고 있다고 서술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사용자의 위치가 추적 가능하며, 내가 검색한 것이 곧 화면에 뜨는 알고리즘 사회. 경험은 화면 속에서 일차적으로 실현된다. 어딜 가지 않고도 SNS나 유튜브, 블로그를 통해 대리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오아르미술관을 검색해 나오는 구도대로 인증샷을 찍고 말았지 뭔가. 인증샷만 찍은 것은 아니고 작품이나 미술관 건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렸다. 하지만 진짜 경험이라고 할만한 것은 따로 있었다.
책에 따르면 '경험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자신의 육체를 통해 즐기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경험이 멸종되어 간다고 표현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가 진짜 경험한 것은 등산이었다. 펜션 사장님이 숙소 부근의 칠불암을 추천해 주셨는데 처음 듣는 곳이었다. 40분이면 오른다, 슬슬 가면 된다, 막판에 돌계단만 좀 힘들다 이 말을 듣고 마지막 날 아침 코스가 결정되었다.
난데없는 산행을 할 줄은 몰랐다. 롱패딩을 입고 베레모를 쓰고 산엘 오르다니. 물 하나를 손에 들고 두런두런 얘기하며 오르는 겨울산. 쉽지는 않았다. 언제까지 가야 하나 힘들어지면 어쩌나 그런 생각들이 한 번씩 몰려왔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옆에 있는 언니(이번에 교장선생님이 되셨다!)와의 대화가 즐거워서 씩씩하게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다. 숨을 몰아쉬고 바로 앞만 보며 오르기를 한 시간 정도. 파란 하늘과 탁 트인 산세, 작은 암자 하나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암석에 양각으로 새겨진 부처님 일곱 분. 절로 숙연해졌다. 초를 하나씩 사서 식구들 이름을 쓰고 같이 절을 했다. 고3 아들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났다. 이걸 하려고 경주에 왔던 걸까. 다른 사람 다 가는 데에서 인증샷 찍고, 그런 여행 말고 내 발로 직접 걸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 쓸 수 있는 시간을 보내다니. 남산 사진엽서를 무료로 보내준다는 우편함이 있어서 아들 기숙사로 엽서 한 장을 썼다. 땀도 나고 다리도 후덜거렸지만 오르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들었다.
내려와서 펜션 사장님께 체크아웃 인사를 드리니 칠불암의 기도가 잘 듣는다며, 배우 김우빈이 다녀간 곳이란다. 그 얘길 들으니 더 뿌듯해졌다. 우리 일행 뒤로 승복을 입은 분들이 우르르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식당으로 오셨다. 공양을 드린다고 모셨다고 한다. 덕을 베푸는 분께 좋은 기운을 얻은 것 같았다.
<경험의 멸종>에서는 실제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는 가치로 '뜻밖의 행운, 직관, 공동체, 자발성, 공감'을 든다. 인스타그램에서 찾은 경주로만 여행을 했다면, 그저 겉에서 보는 관광만 했을 것이다. 칠불암을 고되게 올라 뜻밖의 행운을 맛보았고, 숙소에서 이루어진 매일밤의 체조와 한 번의 요가수업, 서프라이즈 선물로 받은 시집과 독서노트 또한 자발성에서 나온 것이리라. 직관이라, 밤마다 나는 스프레드 천을 깔고 타로카드를 펼쳤다. 고민을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는 우리가 공감하는 공동체임을 확신할 수 있다.
개성 넘치는 우리의 여행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다. 첫날 아침 대전역 가는 택시를 불렀다. 트렁크를 싣고 자리에 앉았다가, "기사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하고 다시 집엘 뛰어갔다. "중요한 걸 놓고 오셨나 봐요." 내가 가져온 것은 타로카드였다. 가져가야지 생각만 하다가 카카오택시가 예상보다 빨리 와서 놓친 것이다. 얼른 택시를 타고 대전역으로 가는 차 안에서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놀랐다. 타로카드만 챙기고, 내 지갑-카드-은 안 챙긴 것. 하지만 뭐, 우리 팀이 있는데 걱정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차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그렇게 2박 3일 지갑 없이 편하게 여행을 다닌 나만의 경험, 어떤가? 누구도 따라 할 수는 없겠지요?
@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경험의 멸종>, 어크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