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과 나날>을 보고
예술관에서 하는 영화들에 끌리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이번에 마음을 사로잡은 건 심은경 주연의 일본 영화. 눈 쌓인 고장을 여행하는 시나리오 작가의 이야기다.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기대하며 모자 쓰고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고 극장엘 갔다.
액자소설처럼 영화 속에 영화가 나오는데 내부에 있는 영화는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바깥 영화는 겨울이 배경이며 두 주인공이 등장하는 한 쌍으로 구성된다.
#1 영화 속 영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걷고 이야기하고 또 걷는다. 무성한 초록과 파란 바다를 배경으로 두고 둘은 지루한 삶을 말한다. 잔잔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다음날 다시 만난 둘은 곧 폭풍우가 올 바다에서 헤엄을 치는데, 시종일관 정적이고 유약했던 남자 주인공은 위험천만한 바다에서 단 한 번 살아있는 표정을 보여준다.
#2 영화가 만들어지고 슬럼프 극복을 위한 여행
이 영화의 GV 때 시나리오 작가 '이'는 영화화된 걸 보니 어떠냐는 관객의 질문에 '저는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답한다. 시간이 흘러 눈 쌓인 고장에 여행 간 '이'는 만실로 숙소를 찾지 못하고 지도 바깥에 있는 여관을 찾아간다. 혼자 여관을 운영하는 아저씨 벤조. 그와의 만남이 '이'를 계속 쓰게 한다.
생명력 넘치는 바다와 눈이 고요히 내리는 겨울 풍경이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입김이라든가 푹푹 빠질 듯 높이 쌓인 눈은 관객마저 춥게 했는데 그런 감각들보다 유독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둠이었다. 영화 속 영화에서도, 영화에도 어둠이 꽤 오래 지속되는 기분이었다. 영화 속 영화에서 두 인물이 어스름해질 무렵부터 대화를 나누는데 표정이 안 보이도록 어두워졌는데도 그 어두움은 더 더 계속되어 놀라웠다. 이 영화는 어둠으로써 말하고 있구나. 마치 슬럼프에 빠진 듯 길고 어두운 터널 속을 지나고 있는 기분이랄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한번 뭔가 안 풀리면 내내 이어지는 부정적인 생각 같았다. 그리고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도 이 어둠의 시간들에 대한 것 아닐까.
벤조는 작가라는 '이'에게 시나리오에 여관 이야기를 해도 좋다는 둥 그렇게 하면 여관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겠느냐며 말을 건다. 작가는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건 곤혹스러워하는 아저씨. 어두운 밤, 대화 끝에 '이'는 여관에 볼거리라도 있으면 더 낫지 않을까요 제안하고. 그러다가 갑자기 벤조가 그럼 지금 당장은 어때, 하며 그 볼거리를 구하러 집을 나선다. 얼떨떨해하는 '이'에게 뭐라도 하지 않으면 우울한 생각만 계속하겠지, 답하며 재촉한다. 이 모험은 깜깜한 밤중에 몰래 이루어지는데! 말리던 '이'는 이 해프닝 덕분에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누구에게나 닥쳐 오는 슬럼프의 시간, 어떤 태도로 어둠의 시간을 보낼 것인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정 말고 변화와 도전 쪽으로 몸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 영화가 왜 그렇게 보고 싶었을까. 창작하는 사람의 마음에 대한 거라서 그랬나 보다. 이방인으로서 언어를 다루는 '이'는 얼마나 더 절실하게 그 언어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을까. 또 얼마나 자신에게 좌절했을까. 말에게서 도망치려고 떠났다는 그 여행에서, '이'는 자기만의 길을 찾은 듯 보인다.
마지막 장면은 '이'가 떠나는, 아니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멀리서 보여준다. 쌓인 눈 때문에 발이 푹푹 빠지고 뒤뚝거리며 걷는 그 모습이, 창작자의 매일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잘하는 것 같지 않고, 만족스럽지 못한 하루하루들.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좋다. 내가 그 방향으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상관 없는지도 모른다. 걷다 보면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도 있고, 빙글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더라도 걸었던 시간만큼은 나의 것이다. 남들과 다른 자기만의 길을 걷는다는 면에서 어쩌면 세상의 모든 창작자는 이방인인지도 모르겠다. '이'는 계속해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나갈 테다. 슬럼프다 싶으면, 또 훌쩍 여행을 떠나면서. 깜깜한 터널을 통과하니 하얀 눈 세상이 펼쳐지는 그런 여행을 꿈꿔본다.
@ 미야케 쇼, <여행과 나날> - 쓰게 요시하루의 만화 <해변의 서경>, <눈집의 벤조> 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