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뮤지컬은 물론 영화 시카고도 안 봤다. 피자 자체를 썩 즐겨 먹지 않는데 시루떡처럼 무식하게 두툼한 시카고 피자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냥 스포츠를 잘하는 도시 정도로만 알았다. 마이클 조던이 NBA를 잘근잘근 씹어드시던 90년대, 시카고 사람들은 참 좋겠구나 생각했다. 바르셀로나 시민이 메시 때문에 행복한 것처럼.
이태 전, ‘미국 음악의 뿌리’를 주제로 취재를 간 일이 있었다. 재즈의 본고장 뉴올리언스에 대한 기대는 컸던 반면 블루스의 도시인 시카고에 대해선 시큰둥했다. 메탈리카, 건즈앤로지즈, 너바나, 레드 핫 칠리 페퍼스 같은 헤비메탈과 록 음악은 CD와 테이프가 닳고 늘어질 만큼 들었지만 그 음악의 뿌리에 대해선 무지했고 관심도 없었다. 블루스는 너무 낡게 느껴졌다. 어쩌다 트로트는 들어도 KBS 국악한마당은 절대 못 보는 것과 비슷하달까.
유나이티드항공 비행기가 오헤어 공항에 착륙하며 보여준 시카고의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미시건 호수는 바다처럼 넓었고, 도시 전체가 축구장처럼 완벽한 평지였다. 체스판처럼 반듯반듯한 길에는 가로수가 풍성했다. 도면에 자를 대고 연두색 형광펜으로 죽죽 그은 것 같았다.
시카고가 블루스의 도시라는 건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었다. 햄버거 집, 벼룩시장에서 끈적끈적한 블루스 라이브 연주가 펼쳐졌고 들른 박물관마다 도시와 블루스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었다. 블루스는 시카고를 기반으로 알앤비, 가스펠, 하우스 음악으로 발전했다고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하우스 오브 블루스’라는 공연장에서 브런치를 먹으며 가스펠 공연을 감상하고, 유서 깊은 클럽에서 블루스 밴드의 신들린 연주를 구경하고, 마침 밀레니얼 공원에서 열린 ‘시카고 하우스 페스티벌’을 즐기며 이 도시가 왜 음악에 대해서라면 어깨 뽕이 잔뜩 들어있는지 알 수 있었다.
미국 남부 흑인 노예들의 음악이었던 블루스가 왜 시카고에서 유행했을까. ‘시카고 역사 박물관’ 직원의 설명이 아주 명료했다.
“19세기 말부터 남부 흑인이 경제가 급격히 발전한 시카고로 올라왔습니다. 윌리 딕슨, 무디 워터스 같은 불세출의 블루스 뮤지션도 그런 경우죠. 이들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받아들이고 전자기기를 활용해 시카고 블루스를 만들었습니다. 농촌인 남부에서는 어쿠스틱으로 연주해도 음악을 잘 들을 수 있었지만, 대도시인 시카고는 너무 시끄러웠던 거죠.”
취재 일정 중 과거 명성을 떨쳤던 레코드사를 방문했다. 지금은 ‘윌리 딕슨의 블루스 헤븐’이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쓰이는 체스 레코드였다. 윌리 딕슨은 블루스계의 시조새, 단군 할아버지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미국 최초의 프로 블루스 뮤지션이란다.
박물관에서는 하루 두세 차례 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사실 별 기대가 없었다. 미국에는 워낙 자잘한 박물관이 많은데다 그 보잘 것 없는 박물관 중 상당수가 허무 개그처럼 대수롭지 않은 사연을 가진 걸 많이 겪어봤기 때문이다. 이날은 유독 더웠다. 안내를 맡은 박물관 직원 저지 재닌은 시작부터 땀을 뻘뻘 흘려 방문객을 무안하게 했다. 다소 피곤해 보였던 재닌은 박물관을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도리어 점점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처음엔 다소 따분해 했다가 롤링스톤스, 에릭 클랩튼, 지미 헨드릭스, 레드제플린 등 비로소 아는 뮤지션 이름과 그들의 사연이 나오기 시작하자 귀가 쫑긋해졌다.
개그우먼 박지선이 돌고래 창법을 선보인 노래 ‘Loving you’를 바로 여기서 녹음했다. 1974년 체스 레코드에서 비서로 일하던 미니 리퍼튼이 원곡의 주인공이다. 레드 제플린이 부른 ‘Whole lotta love’의 원곡도 여기서 녹음됐다. 바로 무디 워터스의 ‘You need love’라는 곡이다.
재닌은 휴대용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 다니며 사연 있는 노래들을 짧게 짧게 들려줬는데, 딱 한 곡만큼은 사연을 길게 설명하고는 2층 간이 공연장에서 블루투스 스피커가 아닌 대형 스테레오 스피커로 감상했다. 여성 블루스 보컬 에타 제임스가 부른 ‘Fool that I am’이란 노래였다. 1960년 바로 이곳 스튜디오에서 녹음했다.
에타 제임스라는 가수는 잘 몰랐지만 노래를 들으니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서 두어번 쯤 들어본 듯한 명곡임을 알 수 있었다. LP였는지 CD였는지 알 순 없지만 힘 좋은 앰프와 빵빵한 스피커를 통해 제임스의 숨소리까지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가사는 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느릿한 소울풍 블루스 노래에 묻어 있는 애상, 후회, 허무 같은 감정을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모두 실제 공연을 감상한 것처럼 손뼉을 쳤다. 어쩐 일인지 재닌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가사가 너무 아름다운 노래에요. 전 이 부분이 특히 좋아요. All my dreams just disappeared.
Like the smoke from a cigarette. 혹시 이 부분을 여러분의 언어로 한 번 얘기해주겠어요?”
동행 중 영어를 가장 잘하는 이가 한국어로 읊었다. “내 모든 꿈들이 담배 연기처럼 사라졌다.”
함께 음악을 감상한 커플이 있었는데 아마도 프랑스인이었던 것 같다. 샬라샬라샬라~~
다른 언어로 가사를 들은 재닌이 말했다. “역시 어떤 말로 들어도 아름다운 가사군요.”
에타 제임스의 노래도 좋았지만 재닌의 저 한 마디 또한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어쩌면 음악의 힘을 한 마디로 표현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