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갈 땐 숙소 선택을 아내에게 맡긴다. 아니, 일정 전체를 위임한다. 이유가 있다. 출장을 많이 다니다보니(물론 코로나 이전 이야기) 휴가만큼은 촘촘히 일정을 짜고 이것저것 계획하는 피곤함에서 해방되고 싶다. 그렇다고 아내가 완전히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아니다. 이건 하고 싶어, 거긴 가보고 싶어. 이렇게 한두개 요구사항을 얘기하다가 슬슬 이것저것 간섭하게 된다. 너무 비싼 리조트는 피하자, 네이버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서 한국인이 좋다는 식당은 무조건 걸러라 등등. 결국 "그럼 당신이 하든가"란 핀잔을 듣는다. 자주 반복되는 패턴이다.
2019년 2월, 베트남 호치민+달랏 휴가는 대체로 준비과정이 매끄러웠다. 한국의 혹한 추위를 피해 호치민에 도착했을 때는 따뜻한 볕을 쬐는 것만으로 좋았다. 공원(쓰레기가 많긴 했지만)을 거닐고, 여행자거리(오토바이 소리가 시끄럽긴 했지만)에서 맛난 반미와 다채로운 쌀국수를 사 먹으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국내선 저비용항공을 타고 달랏으로 넘어갔다. 정확히 2년만이었다. 2017년 2월, 취재차 달랏을 혼자 찾았었는데 그때 달랏은 신세계였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여기 동남아 맞아?' 정도 되겠다. 무엇보다 날씨가 완벽하다. '영원한 봄의 도시(City of eternal spring)'란 수식어가 적확하다. 연중 봄처럼 바삭한 햇살이 비추고 살랑살랑한 바람이 분다. 끈적끈적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동남아가 아니다.
그리고 아직 외국인 관광객, 특히 한국인이 많지 않다. 달랏은 프랑스 식민시절, 프랑스인들이 개발한 휴양지였다. 끈적끈적한 날씨에 시달리다가 알프스처럼 시원한 고산지역을 가니 얼마나 반가웠겠나. 프랑스가 물러간 뒤에는 베트남 사람들의 신혼여행지로 줄곧 인기를 끌고 있다. 그래서 관광객 상당수가 베트남 내국인이다. 조금씩 늘고 있긴 하지만 아직 달랏공항으로 들어가는 국제선 비행기도 몇 편 없다.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 커피 문화가 발달했다. 고급 아라비카 커피를 재배하는 농장이 많고, 맛난 커피를 파는 카페도 많다. 이 모든 것, 그러니까 연중 날씨가 봄 같고 국제선 비행기가 많이 안 오고 커피 농장이 많은 건 단 한 가지 조건 덕분이다. 달랏은 해발 1500m에 자리한 도시다.
달랏 숙소는 짜장 반, 짬뽕 반으로 구성했다. 아내가 찾아낸 비앤비 2박, 내가 출장 때 갔던 호텔 2박. 이른 아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택시를 타고 비앤비를 찾아갔다. 중심가에서 다소 벗어난 동네였다. 역시나 내 주특기인 '이죽거리기'가 발동했다. 숙소에서 시내까지 거리가 좀 되는 것 같네. 달랏은 대중교통도 없고, 그랩(공유 자동차)도 없어서 웬만하면 걸어다녀야 하는데...
3층짜리 주택 앞에 택시가 멈췄다. 마당을 지나 1층 로비로 갔더니 서양인이 반겨주며 자기 소개를 했다. 엄마는 베트남, 아빠는 호주 사람이고 호치민에 살다가 몇 년 전 달랏으로 와서 비앤비를 시작했다고. 2층 객실로 이동했다. 방은 좁았다. 화장실은 더 좁았다. 오래된 목조주택이어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이 삐걱거렸다. 짐만 풀어두고 로비로 내려왔다.
집주인이 추천해준 식당에서 2000원짜리 쌀국수를 먹은 뒤 수안 홍 호수를 비롯해 시내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좁은 방에서는 잠자는 것 말고 할 게 없었다. 다행히 나가 있을 공간이 많았다. 2층 공용 거실, 나무의자에 앉아 고양이를 스다듬으며 책을 읽었다. 1층에서 듣기 좋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스마트폰의 노래 찾기 앱을 확인해봤다. 다프트 펑크의 'Within'. 많이 들어는 봤는데 제목은 몰랐다. 다프트펑크는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인 전자음악 듀오인데 이 곡에는 캐나다 피아니스트 '칠리 곤잘레스'가 피처링으로 참여했다. 보컬에 전자 사운드를 가미하긴 했지만 피아노 선율이 감미로운 EDM스럽지 않은 곡이다.
within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반복 재생됐다. 그러더니 누군가 피아노로 그 곡을 따라서 연습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답답했다. 4마디 이상을 매끄럽게 이어나가질 못했다. 피아노 연주가 뚝, 뚝 끊겼고 거푸 틀린 음을 눌렀다. 누군지 궁금해 내려가봤다. 찢어진 검은 데님 바지에 검은색 워커를 신고 큰 은빛 귀고리를 한 숙소 직원이 피아노에 앉아 있었다. 딱 80년대 헤비메탈 가수 차림이었다. 그는 턱수염을 긁적이며 피아노를 잘 못쳐서 미안하다며, 필요한 게 있냐고 물었다. 머쓱해 했지만 기가 죽은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 태도가 도리어 좋았다. 나는 괜찮다고 편하게 계속 연습하라고 했다.
이튿날. 아담한 정원에서 온갖 꽃에 둘러싸여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하루짜리 가이드 투어에 나섰다. 보통 휴가를 가서 가이드가 안내하는 여행을 하진 않지만 달랏에서는 하루쯤 아무 신경 안 쓰고 남이 짜준 일정을 따르고 싶었다. 어젯밤 그 피아노의 주인공이 친구가 자기 차로 가이드 투어를 한다며 소개해줬다. 기아 카렌스를 타고 달랏에서 가장 높은 랑비엥 산, 유명한 커피 농장, 옛 기차역 등을 둘러봤다. 여행사에 속한 정식 가이드는 아니었지만 해박하고 친절하고 영어도 잘하는 가이드와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다.
다시 숙소에 들어와 저녁을 먹었다. 이 숙소는 음식 솜씨도 준수했는데, 어젯밤 그 직원이 음식을 건네줬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밤이 깊어오자 다시 그 노래가 들려왔다. within. 어제와 비슷한 패턴이었다. 원곡이 세 번 정도 재생됐고, 이어 절름절름 피아노 연주가 이어졌다. 아내와 나는 키득키득했다. 이 상황이 너무 재미 있었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한 뒤 달랏에서 다른 호텔로 잠자리를 옮겼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프랑스인들이 지었다는 빌라형 리조트였다. 숙소는 훨씬 근사했지만 밤이 어쩐지 허전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within을 찾아서 감상했다. 세번 네번 연거푸 틀었다.
그 뒤로 우린 한국에 와서도 within을 자주 듣고 있다. 달랏을 추억하고 싶을 때, 여행지에 가서 나른한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또 둘이 싸워서 분위기가 어색해졌을 때 화해의 BGM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