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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Mar 16. 2022

사육당해도 좋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장거리 비행의 맛

펜데믹 시대의 프랑스 출장

2022년 3월 21일. 해외 입국자에 대한 자가 격리 의무가 사라진다. 코로나 사태 이후 2년여 만이다. 아니다. 정정한다. 지난해 7~12월, 잠깐 격리 면제기간이 있었다. 일상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지만 오미크론의 급속한 확산으로 되살아난 해외여행 시대는 다섯 달 천하로 끝났다. 잠깐 국경이 열렸던 당시 프랑스로 출장을 다녀왔다. 불과 다섯 달 전 일인데 아득한 옛날 같다.


인천발 에어프랑스 비행기는 자정 무렵 출발이었다. 서너 시간 전 공항에 도착하도록 서둘러 집을 나섰다. 공항버스는 대부분 운항 중단 상태였기에 전철을 이용했다. 인천공항 2 터미널에 도착했더니 예상대로 공항은 썰렁했다. 확인할 서류가 많아서 체크인 과정이 오래 걸릴 줄 알았다. 그러나 국제선 비행 편 자체가 코로나 이전의 5%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그마저도 승객이 많지 않아서 수속, 출국 심사, 보안 검색이 일사천리로 끝났다. 면세 구역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냄새다. 그렇다. 샤넬과 구찌와 폴로 향수 냄새가 뒤범벅된 약간 어지러운 면세점 냄새, 만국 공항의 공통된 냄새.

을씨년스러운 인천공항 제2터미널의 밤.

비행기 출발까지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했다. 시간 때울 곳을 찾아 서성였다. 갖고 있던 신용카드로 라운지를 이용하려 했더니 운영시간이 끝났다. 카페도 식당도 모두 문을 닫았다. 잠정 영업 중단에 들어간 집도 많았다. 하긴, 공항 이용객도 없는데 라운지건 카페건 무슨 수로 예전처럼 운영하겠나. 각 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모두 어디서 무얼 할까 잠시 그들의 안위가 걱정됐다. 게이트 앞에서 책을 읽으며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목이 말랐지만 화장실 앞 음수대에서도 물을 마실 수 없었다. 코로나 확산 우려 때문이었다. 공항에 와보고서야 알았다. 코로나가 단지 해외여행을 틀어막은 게 아니라 어떤 산업 하나를 통째로 붕괴시켰다는 사실을. 청소직원들만이 한산한 공항에서 쉼 없이 청소와 소독 작업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승무원이 내준 물과 오렌지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창밖이 새까만 깊은 , 비행기가 날아올랐다.  기내식이 나왔다. 예전엔  비행기를 타면 기내식을  먹었다.  대신 잠을 택했다. 배가 더부룩하면 잠이  오고 목적지에 도착해 바로 일정을 시작할 경우 컨디션 엉망이었기 때문이었다.  비행기  때는 영화도   봤다. 그러나 이게 얼마만의 비행인가. 마치 용돈 모아서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본 대학생 배낭여행객처럼 황송한 마음으로 기내식을 우걱우걱 먹었다. 와인도  모금했다.


푹 자고 나니 유럽 하늘이었다. 창밖이 밝았다. 착륙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두 번째 기내식이 나왔다. 예전과 달리 사육당한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역시 프랑스 비행기라 그런지 빵 맛이 좋았다.

얼마만의 기내식인지. 누가 프랑스 비행기 아니랄까봐 에어프랑스 빵 맛 하나는 끝내줬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의 입국 수속은 싱거울 정도로 신속했다. 영문 백신 접종 증명서, 주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내려받아 작성한 여행 서약서, 프랑스 정부의 백신 패스 등등을 잔뜩 출력해서 챙겨갔는데 입국심사관은 여권만 확인했다. 프랑스가 ‘위드 코로나’ 정책을 일찌감치 시작하면서 외국인 입국 문턱을 낮춘 까닭이었다. 다국적 승객들로 북적북적한 샤를 드골 공항의 모습은 인천공항과 극명하게 대비됐다. 사람들이 마스크만 쓰고 있었지 코로나 터지기 전과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최종 목적지인 마르세유까지 가려면 환승 터미널에서 또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었다. 몇 달 전 새롭게 개장한 에어프랑스 라운지는 신축 호텔처럼 반짝반짝했다. 신문을 읽고, 노트북을 두들기고, 진지한 표정으로 비즈니스 전화를 하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니 나도 뭔가 국제시민의 일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냅 존(Nap zone)에서 쪽잠을 잔 뒤 샤워를 했다. 바삭한 크루아상과 셰프가 만들어준 오믈렛을 먹으니 프랑스에 왔다는 게 실감 났다. 역시 빵의 나라다.

프로방스 지역에서 나흘간 예정된 취재 일정을 잘 소화했다. 프로방스가 어땠냐고? 그 얘긴 다음에. 이번에는 오랜만의 비행 경험, 코로나 시대의 공항 분위기만 끄적이는 거니까. 한 단어로 프로방스의 소회를 남긴다면, 판타스틱!  

파리 공항 라운지 풍경.

마르세유에서 파리로 건너가서 이틀을 보낸 뒤 다시 인천행 비행기를 탔다. 낮 비행기였다. 이번에는 잠을 안 자고 오롯이 비행기 안에서의 여유를 누릴 참이었다. 느긋하게 기내식을 먹었다. 어째 프랑스로 갈 때보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나온 빵이 더 맛있었다. 승무원에게 요청해 빵을 두 개나 더 먹었다. 바게트도 맛있었지만 브리오슈가 환상적이었다. 승객이 많지 않고 여유로워서인지, 프랑스인 승무원은 내게 역사 이야기도 들려줬다. 프랑스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가 극도의 가난을 겪은 국민들이 “빵을 달라”라고 주문하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고 말했다가 목이 잘렸다는 전설. 그게 사실은 케이크가 아니라 브리오슈였다고 한다.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하고 빵 터지진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저 말조차 앙투아네트가 한 게 아니라고 한다. 어쨌든 낯선 이방인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눈 경험 자체가 특별했다.

브리오슈를 맛있게 먹은 뒤에는 책을 읽었다. 일부러 영화는 보지 않았다. 장거리 비행의 장점이 이거 아닌가. 평소에 읽고 싶었던 장편소설이나 진도를 빼기 어려웠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 이승우 작가의 [캉탕]을 읽었다. 프랑스에서 인기 있는 한국 작가이니 왠지 그의 소설이 끌렸던 까닭이었다. 소설도 좋았지만 이렇게 ‘강제 디지털 디톡스’가 된 채로 집중해서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얻었다는 게 좋았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을 못 가서 아쉽진 않았다. 한데 여행을 둘러싼 이런 자투리 같은 시간과 순간만큼은 그리웠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낯선 이와 경계심을 풀고 이야기를 나누고, 디지털 기기의 방해를 받지 않고 책을 읽고, 잠깐이나마 내가 수십수백 개 언어를 쓰는 사람들과 지구라는 행성에 함께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기분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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