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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 Mar 30. 2022

멀쩡히 출근한 노동자 5~6명이 퇴근 못하는 세상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을 읽고

브런치에는  리뷰가 처음이다. 존재를 알리고 싶은 책이 있어서 남겨본다.


2019년 11월 21일 자 경향신문이 파격적인 1면 편집으로 화제가 됐다.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제목을 걸고 산재 사망자 1200명의 이름을 한 면 가득 광고 없이 채웠다. 편집이 파격적이었다면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1200명은 1년 9개월간 고용노동부에 보고된 주요 5대 사고(떨어짐, 끼임, 깔림, 부딪힘, 물체에 맞음) 사망자 수였다. 김OO(50, 떨어짐). 이런 식으로 나이와 사망 원인만 건조하게 나열했지만 어떤 기사보다 많은 메시지를 함축한 한 페이지였다. 며칠 뒤 소설가 김훈은 이 기사의 후속으로 ‘이것은 약육강식하는 식인사회의 킬링필드’라며 특별기고문을 냈다.

그리고, 올해 1월 <2146, 529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동자의 죽음>이란 책이 나왔다. 2146은 2021년 산재 사망자 수 추정치이고, 529는 그중 사고로 사망하거나 과로사한 노동자 수다. 경향 기사가 나가고 2년 여가 흘렀지만 노동 현실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책은 산재 사망 노동자를 다룬 언론사의 3~4줄 단신 기사로 구성했다. 경향 기사보다 조금 더 구체적이다.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다가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지 서너 줄 기사가 압축적으로 설명한다. 협력업체, 외주업체, 하청업체 노동자가 유난히 많고 외국인 노동자도 적지 않다. 그러니까 기업이 값싼 노동력에 ‘위험을 외주화’ 한 결과가 2146, 529라는 숫자다.


책에는 낯선 용어가 많이 등장한다. 동바리, 백레스트, 달비계, 틀비계, 이재기, 오거, 선라이트 등등등. 안전한 사무실(요즘은 집에서)에서 자판을 두드리며 일하는 나를 비롯한 직장인은, 어쩌면 평생 만날 일 없는 기구와 장비들이다. 반면 어떤 이에겐 컴퓨터 자판보다 친숙한 물건, 장비일 테다. 그 친숙한 기구에서, 그 장비를 다루다 노동자들은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운이 나빠서, 부주의해서가 아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위험하게 일하도록 내몰려서다. 위험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위험 덕에 우리는 위험과 거리를 두고 살 수 있다.


기계에 끼이고 사다리에서 떨어지고 지게차에 깔리는 사고는 공장이나 공사 현장에서만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 특급호텔, 교회, 워터파크, 수목원, 골프장, 전원주택 같은 곳에서도 사고가 빈번히 일어났다. 우리가 먹고 놀고 쉬는 공간, 그러니까  불행이라곤 끼어들 틈 없을 것 같은 장소도 누군가의 죽음에 빚지고 있을 수 있다. 모두가 선망하는 브랜드 아파트, 누구나 다니고 싶어 하는 IT 회사와 공기업 건물에서도 노동자가 죽어갔다.

2146은 사망자 숫자다. 그럼 부상자는 얼마나 더 많을까. 동료의 죽음을 본 노동자는 또 얼마나 많을까. 살아남은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다시 밥을 벌러 나갔을까. 난데없는 죽음 앞에 가족은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을까 생각하니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기분이었다. 그래서 신문 단신으로 이뤄진 얇은 책이지만 진도를 빼기 쉽지 않았다. 어떤 페이지에서는 노동자의 절규가 들리고, 또 다른 페이지에서는 사고를 내고도 자비 없이 돌아가는 쇳덩이 기계소리가 메아리친다.  

한국은 OECD에서 인구 5000만이 넘는 나라 중 산재 사망자 수가 1위란다. 청와대가 시민 곁으로 가면 뭐하고, 세계 1위 핸드폰을 만들면 뭐하고,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돌풍을 일으키면 뭐하고, 감염병 우수 방역 국가면 뭐하나. 멀쩡히 출근했다가 집으로 못 돌아오는 사람이 하루 5~6명 꼴인데.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고, 나를 위로해주는 책을 읽을 시간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들추는 것 자체가 불편할 수도 있을 테다. 그러나 눈감는다고 개선될 문제가 아닐뿐더러 우리가 애써 무시할수록 누군가는 더 위험한 세계로 내몰릴 것이다. 1만원도 안 되는 북펀드를 하고 책 한 권 읽었다고 생색내는 건 아니다. 미력하나마 애도에 동참하고 싶을 따름이다. 억울한 죽음이 많은 나라에서 산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애도는 절망보다 희망과 나란히 있으려는 관성을 따른다”는 양경언 평론가의 해설처럼 일단 슬퍼하는 게 우선이겠다. 애도야말로 작은 실천이고, 또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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