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재즈에 입덕한 계기는 그 전이었다. 치앙마이 여행 두 달 전, 재즈의 발상지 뉴올리언스를 출장으로 다녀왔다. 뉴올리언스는 괜히 뉴올리언스가 아니었다. 골목을 걸을 때마다 버스킹 밴드를 마주쳤고, 유서 깊은 레스토랑과 바, 심지어 도넛 집에서도 라이브 연주를 들었다. 재즈가 일상이었고 재즈가 없는 이 도시는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딘가 거리감이 느껴졌다. 재즈 본고장에서 외계인처럼 음악을 갖고 노는 뮤지션의 공연을 감상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재즈이지, 내 일상에 녹아들 수 있는 음악은 아닌 것 같았다. 내 몸 상태도 관련 있다. 출장 이틀째부터 장염이 시작됐다. 지난번 미얀마 글에도 장염 얘기가 등장하더니만... 자세한 설명은 그만. 어쨌거나 기력이 없어서 음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사실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도 개성 강한 음식이 많은 미식 도시인데, 그 맛난 음식들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도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픽업트럭을 개조한 택시 '썽태우'. 사람은 안 태우고 개만 태우고 있네.
7월 중순, 치앙마이는 우기였다. 오후 서너시 쯤엔 어김없이 스콜이 쏟아졌다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하루 종일 눅진했다. 며칠 지내다 보니 그런대로 적응이 됐다. 오, 공짜로 미스트를 뿌려주는 도시구나, 하고 생각했다. 스콜이 쏟아질 때는 카페에 앉아 그치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나쁘지 않았다. 동남아를 수십 번 가봤는데, 우기를 즐기는 방법을 이때 비로소 깨우쳤다. 얼굴과 함께 펼친 책도 눅눅해졌지만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가사처럼 장판이 나인지 내가 장판인지 모를 그 나른함조차 즐길 수 있게 됐다.
치앙마이에서는 재미난 바를 두 곳 가봤다. 한 번은 2018 월드컵 결승전을 보기 위해 들어갔던 이름 모를 스포츠 펍. 나는 크로아티아를 응원했는데 바 안에는 대부분 프랑스인 여행자여서 얌전히 TV 화면만 쳐다봤다. 결과는 아시는 대로 프랑스의 완승. 잔뜩 취한 프랑스인들은 서로 얼싸안고 난리 났었다. 프랑스가 졌더라면 아마도 난동이 일어났을 테다.
치앙마이 올드시티 북문 앞에 자리한 노스 게이트 재즈 코업.
다음으로 인상적이었던 바는 구시가지 북문 앞에 있는 '노스 게이트 재즈 코업(North gate jazz coop)'. 아주 캐주얼한 분위기의 재즈 바다. 조금 일찍 도착해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 공연을 기다렸다. 곧 밴드 멤버들이 하나둘 악기를 쥐고 무대에 나타났다. 딱 봐도 20대의 앳된 얼굴들이었다. 색소폰, 트럼펫, 전자기타 둘, 베이스, 드럼으로 이뤄진 6인조였다.
첫 곡부터 심상치 않았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데 제목은 모르는 곡이었다. 색소폰과 트럼펫, 두 대의 관악기가 시작부터 강하게 밀고 나가는 곡 분위기가 어쩐지 치앙마이 올드시티와 어울렸다. 그러니까 낡았지만 당당한 멋과 기품을 두루 갖췄달까. 곡 순서를 적어둔 종이쪽지를 살짝 봤더니 'mercy, mercy, mercy'라고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 각 악기의 솔로가 너무 현란한 곡보다 연주자의 합이 느껴지는 멜로디가 탄탄한 곡을 좋아한다. 이 노래가 딱 그렇다. 플립플롭 슬리퍼(일명 쪼리) 신은 다리를 떨면서 멜로디 흥얼거리기에 딱 좋은.
mercy mercy mercy에 이어서 역시나 제목은 모르지만 낯익은 선율의 재즈 스탠더드가 이어졌다. 딱 한 곡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있었다. Fly me to the moon. 내가 프랭크 시나트라라도 된 듯 한껏 흥이 올라 목청을 높였다. 곡 후반부에 이르며 분위기가 고조될 때는 달나라까지 붕 떠오른 기분이었다.
재즈바의 가격이 저렴하다고 공연 수준까지 낮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20대 청춘들의 힘 넘치는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선 재즈 클럽을 잘 다니지 않는다. 술을 못하기도 하거니와 너무 비싸다. 지금 사는 성수동에도 재즈클럽이 있어서 두어 번 가보긴 했다. 수준급 라이브를 코앞에서 감상하는 건 좋았지만 알코올 음료를 반드시 주문해야 하고 안주 값도 비싼데다 공연 관람료까지 추가로 내야 한다. 음식 몇 개 사 먹으면 치앙마이 재즈바의 열 배 가까운 돈을 쓰게 된다. 게다가 잔뜩 멋을 부린 커플 관객들이 도무지 음악에 집중을 안 한다는 것도 프로불편러인 나를 불편하게 했다.
반면 노스 게이트 재즈 코업은 동네 사랑방처럼 편하다. 캐주얼하고 저렴하고 흥이 넘친다. 맥주병이든 콜라병이든 한 손에 쥐고 주야장천 재즈를 느끼기 좋다. 4000원의 행복이라 할 만하다. 치앙마이에서 가장 반짝이는 추억으로 남은 순간도, 다시 치앙마이를 간다면 가장 먼저 달려가고 싶은 곳도 노스 게이트 재즈 코업이다.
바이러스 확산 전까지 치앙마이는 한국인 사이에서 '한달살기' 붐이 일었던 곳이다. 주로 휴학생, 퇴사자 아니면 장기근속 포상휴가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는데 한 달 동안 뭐하며 지내는지 잘 모르겠다. 내게 한 달이 주어진다면 매주 2~3회는 재즈바에 출근 도장을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노스 게이트 재즈 코업 옆에는 엄청난 가성비의 딤섬집도 있다. 여기는 매일 갈 수도 있겠다. 이 집 죽을 아침마다 먹으면 장염으로 속이 뒤집어져도 싹 나을 것 같다.
매일 출근도장을 찍고 싶은 딤섬집의 화려한 딤섬. 식당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mercy mercy mercy는 1966년 색소포니스트 캐논볼 애덜리가 발표한 곡이다. 55년 전인데도 시간을 초월하여 그 에너지가 느껴지는 명곡이다.